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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 찰리채플린의 웃음 그리고 그의 마스터피스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5. 5. 13. 18:43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찰리채플린의 웃음 그리고 그의 마스터피스」
- 찰리 채플린의 웃음이란
<위대한 독재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란 무엇인가 한번쯤 고민해 보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가 남긴 웃음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코미디란 어쩔 때 포장이 그럴싸한 악마와도 같다. 시대가 직면한 사회적 이슈들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도래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지 않았는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참조) 그리고 2015년의 지금도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엔터테이먼트성은 그런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능을 조심해야한다는 목소리다 일부 들리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는 이런 단순한 차원의 콘텐츠가 아니다. 그를 생각했을 때 대중적으로 성공한 코미디 배우나 슬립스틱 개그의 원조로서만 남아선 안 된다. 그의 코미디는 현실을 무시하고 지나가자는 입장이 아닌, 현실을 잊지 말고 그것을 웃음으로 대항하여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인간에게 직면해 있는 아이러니한 문제들을 코미디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그것은 현실도피가 아닌 현실을 대하는 그의 모습이다. 그리고 모두가 답이 없어 라고 말할 때 그는 희망으로 걸어가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의 웃음은 그냥 ‘하하 호호’ 떠드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강한 사랑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코미디배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그의 코미디는 시대를 품은 예술 작품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Charli Chapline (1889.4.16 ~ 1977.12.25)
- 채플린의 걱정
<위대한 독재자>는 그의 작품들 중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조명하고 있다. 영화가 제작되어 개봉되는 시대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영화가 제작되는 단계에서는 아마 히틀러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후 영화 개봉은 1940년으로 세계 2차 대전(1939)이 발발한 후였다. 채플린은 당시 사회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모던 타임즈>로 물질만능과 인간성 상실에 대하여 심각성을 일깨워주었지만, 세상은 아직도 물질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물질의 달콤함이 유한성이라는 것을 무지한 우리는 알지 못했다. 결국, 경제 대공황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독일은 암울한 사회 상황에서 강력한 영웅상을 필요로 하였고, 결국 히틀러라는 영웅을 가장한 광인을 지도자로 뽑았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그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족주의를 앞세워 잔인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해 나갔다. 더불어 독일의 위대함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등 대대적으로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욕심은 인류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채플린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히틀러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담한 미래를 느끼고 있던 것일까? 점점 히틀러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는 바로 <위대한 독재자>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 시대를 관통한 작품 <위대한 독재자>
매니아국을 독일 나치즘으로, 박테라이국을 이탈리아 파시즘으로, 힌켈을 히틀러로, 나폴리니를 무솔리니로 오스테를리히를 오스트리아로 비유하여 당시 시대상을 코믹하게 비꼬아 표현하고 있다. 힌켈은 유대인 이발사와 외모가 닮았고, 영화 마지막에는 힌켈과 유대인 이발사가 서로 위치가 바뀌어 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토매니아국 군인들은 유대인 이발사를 힌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게 충성을 다한다. 오스테를리히를 점령하고 그것에 대한 연설을 하는 자리에 힌켈 대신 참석하게 된 유대인 이발사. “전 할 수 없어요.” 유대인 이발사는 난감해한다. 그러나 슐츠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해야 만해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슐츠 장교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렇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외치는 것’에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침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유대인 이발사는 용기를 내어 단상에 올라간다. 그리고는 연설을 통하여 우리에게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다. 자유와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큰 발전을 이루어 왔다. 미디어의 발전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른 정보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더불어 기계의 발전은 계속해서 발전되어져 이제는 로봇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핸드폰 하나로도 업무처리가 가능하게 되었고, 그 작은 것으로 음악이니 TV니 심지어 뉴스까지고 쉽고 빠르게 검색이 가능해졌다. 의학의 발전 또한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점점 더 진보되어져가는 의학기술은 사람의 수명을 조금씩 늘어가게 했다.
그러나 우린 아이러니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많은 것들이 편해져가고 있지만, 권력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미디어 아닌가. 소수의 몇몇에 의해 모든 미디어가 움직인다. 영화 전반부에 그런 언급이 있다. ‘모든 방송과 라디오에서 힌켈의 연설이 계속 나가고 있다.’ 그리고 힌켈의 앞에는 수많은 마이크들이 설치되어 있다.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을 때 언론을 장악했던 점이 가장 무서웠다. 영상매체를 통하여 나치즘 교육을 시킨 것 또한 그의 통치 방법이었다. 미디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아주 예민한 놈이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마음만 먹는다면 모든 국민을 바보로 만들 수 있다. 2015년, 우리는 인터넷이나 신문을 또는 뉴스를 통해 올라오는 정보들에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몇몇 사람들은 그걸 못 믿으면 무엇을 믿고 사냐고 말하며 뉴스와 신문을 신뢰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독재자가 그것을 장악하였다면 그것은 답이 될 수 있는 가?
이런 모습들을 보면 이 영화가 1930년대 후반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사실 권력을 잡은 독재자들의 모습은 세월이 변하여도 다를 건 없음을 느낀다. 독재 권력을 가진 그 어느 곳이던 언론매체에 대한 장악은 공식처럼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보여 지는 모든 모습들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득이 안 되면 싸움질을 하고, 이득이 되면 언제 싸웠냐는 듯 웃으면서 악수한다.(힌켈과 나폴리니가 음식을 가지고 싸우는 장면) 그리고는 소통과 화합을 한다면서 손잡은 아름다운 모습을 TV뉴스를 통해 보여주겠지.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아닌가?
<위대한 독재자>를 보면서 매슈 아널드가 예술에 대하여 언급한 말이 떠오른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예술은 삶의 비평이다.」(알랭 드 보통 [불안] 참조) 예술이란 정의가 저렇다면 <위대한 독재자>는 정말 확실한 예술 작품이다.
예술작품으로서 <위대한 독재자>는 시대를 관통하였다. 인류가 인간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한 이 영화는 끝임 없이 우리의 가슴을 건드릴 것이다. 시대가 변화하여도 변하지 않는 인간적 가치는 있다. 이것은 발전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지켜야하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알 수 없는 힘은 우리를 휘감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재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저런 미디어의 눈가림 막으로 오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기만을 원한다. 이젠 한발 짝 물러나 둘러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회체제는 독재를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독재를 견제 할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하며 인간에 대한 가치를 높게 두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방해하는 것에 대항해야한다. 자유를 외치지만 개인의 욕심이 큰 경우에는 다시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그러니 자유를 위해선 베이스로 인간에 대한 가치를 높게 두어야 한다. 그럴 때는 우리 각자는 자신의 욕심을 다루는 과정도 필요하다. <위대한 독재자>는 삶의 한부분만을 조명하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을 두루 돌아보며 인간애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그의 연설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서 존재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존재해야만 한다. 우리가 소시민이었을 땐 긍정의 힘으로 대항하기를, 우리가 권력을 잡았을 땐 독재가 아닌 모두를 위한 희생을 하기를....... <위대한 독재자>는 우리의 거울이다. 그 거울은 보편적 가치이자 진리이기에 시대를 관통하여 존재해 있을 것이다.
- 결국 우리가 해낼 수 있기에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내 개인적인 생각을 남긴다. <위대한 독재자>의 국내 디지털 리마스터링 개봉이 4월 16일이다. 찰리 채플린의 생일도 4월 16일이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은 큰 상처를 입었다.‘4월 16일’이 날짜가 서로 오묘하게 겹치는 점은 무엇일까? 마치 유대인 이발사와 힌켈이 우연의 일치로 닮은 것처럼 이 또한 우연의 일치로 우리에게 무언가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런 거라면 하늘은 <위대한 독재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주의 왕국은 인간들 사이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 한 무리가 아닌 인간 전체에 바로 당신들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기계를 창조할 능력을 지닌 당신들은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힘도 지닌 것입니다!” - <위대한 독재자> 연설 장면 中
현실에 닥친 그 모든 시련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인간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힘으로 해쳐나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한 사람, 한 무리가 아닌 인간 전체에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해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채플린과 똑같이 말하고 싶다. 포기하거나 절망하거나 또는 내가 뭐라 해도 바뀔 건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빠지지 말았으면 한다. 결국, 희망은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나에게 선물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모여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채플린도 말하지 않았는가? 기계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닌 우리가 왜 ‘행복’을 창조하지 못하겠는가? 우린 당연하게도 행복을 창조할 능력이 다부지게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웃음과 눈물로 사랑과 행복을 방해하는 권력에 대항하자. 끊임없이 지껄이자. 그러면 조금씩 우리는 희망을 보게 될 것이고, 행복도 창조되어질 것이다. 난 그럴 거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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