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버드맨> 내면의 거울을 선물한 Birdman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5. 5. 13. 11:58

     


    버드맨 (2015)

    Birdman 
    7.4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
    출연
    마이클 키튼, 에드워드 노튼, 엠마 스톤, 나오미 왓츠, 자흐 갈리피아나키스
    정보
    코미디, 드라마 | 미국 | 119 분 | 2015-03-05

     

     

    내면의 거울을 선물한 <Birdman>

     

     

    서론 -

       난 120분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버드맨>과 함께하는 120분은 12분과도 같았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힘은 너무나 강했다. 인간의 내면을 마치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 본 것 같았다. 하나로 정의되어지지 않는 사람들 간의 눈을 땔 수 없는 감정 충돌!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준 최고의 것이다. 그 충돌을 통해 내가 바라본 인간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묘하게 아름다웠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 테이크는 끊이지 않았다. 영화를 통째로 롱테이크로 갈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쇼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야기가 만약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영화가 보여준 롱테이크는 바로 나일 것이고, 당신일 것이다. 단순히 기술력의 자랑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준 롱테이크는 관객, 감독 그리고 영화 속 캐릭터를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였다.

        배우들의 연기는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나다. 이번년도 최고의 연기를 본 것 같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을까?(나올 수도 있지만.......) 배우들은 그냥 그 캐릭터 자체였다. 이는 연기를 했다기보다. 그냥 자기를 표현한 것 같다. 현실과 영화 그 사이를 무너트리는 연기여서 난 이 영화의 연기가 너무나 좋았다.


     

     

    본론-

        이 영화는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과 같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이 공존하고 있다. 단순히 악한마음과 선한마음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영화 겉으로는 약간은 단적으로 캐릭터를 정리하고 있지만, 실상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더 하기 위해서 인물의 특징을 조금 정리하고 넘어가 보자.

     

    성공한 자(마이크 / 애드워드 노튼)

    다시 명성을 찾으려는 자(리건 톰슨 / 마이클 키튼)

    성공하려는 자(레슬리 / 나오미 왓츠)

    사랑을 원하는 자(/ 엠마 스톤)

     

        이보다 더 많지만 여기까지만 정리를 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여기까지만 봐도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정말 다양하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라 다양한 인물의 성격이 나온다.

     

     

     

    성공한 자 (마이크 / 애드워드 노튼)

        마이크, 성공한 자의 모습을 보라. ‘진실! 진실!’을 외치지만 자기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리건 톰슨의 이야기를 베껴서 신문사 인터뷰에 사용하지 않는가? 자신의 공로로 모든 것을 돌리기 위한 마이크의 모습을 보면 성공한 사람의 성공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가 보여 진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배우의 순수했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진실을 외치고 있지만, 그는 현실에서는 진실되지 못한 사람이다. 어쩔 때 보면 명성과 진실또는 진심은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둘은 마치 함께 갈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마이크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른 것인가? 나는 솔직히 말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뭐라 말 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상상해 보건데(또는 감정이입을 해보자면), 내가 저 상황이라면 나도 저럴 것 같다. 저렇게 행동하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저런 마음과 생각은 조금 할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 마이크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난다면 위기(불안)를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이 부분을 실험한 연구결과도 있다. 내 연봉에 만족도는 타인의 연봉과 비교했을 때 나타난다고 한다. 만약 내가 100만원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지인이 150만원을 번다면 난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마이클 샌델의 책 참조) 마이크는 충분히 성공한 배우였다. 그런데 왜 신문사 인터뷰에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에 대해 생각하여보니 이런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가 시작된다. “당신은 어차피 늙고 한물간 배우야. 누가 봐주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그 희곡은 내가 투입되면서 더 좋아졌잖아? 그러니 내가 쓴거나 마찬가지지.”

        명성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합리화. 누군가 나보다 뛰어난 게 배 아픈 일이 되어버린 욕심들. 성공한 위치에 있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일 것이다. 겉으로는 고결한 척’, ‘뭐 있는 척다 하지만 결국 이런 모습이다. 우리도 언젠가 성공의 위치에 선다면 마이크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게 되겠지.......

     

     

     

    다시 명성을 찾으려는 자(리건 톰슨 / 마이클 키튼)

        우리는 꿈을 쫒는다. 그러나 그 꿈의 성공이란 말은 정말 추상적이다. 리건 톰슨은 배우라는 삶에 있어서 크나큰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성공에 대한 향수도 있을 것이고, 난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자괴감도 들것이다. 영원하지 않은 성공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대한 질문. 이 모든 것이 리건 톰슨이란 캐릭터 하나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젊은 시절 한 시대를 영웅으로 살아간 배우이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을 것이고, 어딜 가나 그의 이름은 빛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 시절은 얼마나 갔을까? 세월은 막을 수 없고, 그 세월에 따라 리건 톰슨도 늙어갔을 것이다. 젊은 시절 버드맨 슈트의 간지는 나오지 않고, 부푼 몸과 주름진 얼굴만이 옛 영웅에 대한 허무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떠나갔고,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크나큰 불안이 밀려왔을 것이다.

        이렇듯 성공은 바람과 같다. 잠시 왔다가 가버린다. 그리고 그 후에 뭐가 올지 모른다. 폭풍이 올 수도 있고, 무더운 햇빛이 올 수도 있고, 또는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가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건 톰슨은 성공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폭풍우를 맞았다. 그리고 돌파구로 다시 자신의 꿈을 찾으려 나아간다. 그 폭풍우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모습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이미 성공한 젊은 놈이 밑에서 자신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나, 돈 들어가는 일은 왜 이리 많은지 빚은 늘어만 간다. 그리고 가족과는 소통이 되지 않아 딸과 계속 마찰이 생긴다.

        이런 그의 모습에 두 가지의 면이 보인다. 첫 번째는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버드맨이란 캐릭터는 상업적 캐릭터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작품성과 연기에 대한 측면보다 화려한 액션과 배우의 비쥬얼만이 빛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는 아주 전형적인 영웅물의 한 부분이다. 리건 톰슨은 배우인생 반평생을 버드맨이란 슈트와 함께 했다. 그런 그에게 다양한 폭의 연기는 힘든 과제였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자신을 돌아보니 하고 싶은 연기를 못해본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연극판에 뛰어든다.

        그러나 두 번째 측면으로 넘어가 본다면 그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다. 그의 그런 모습이 어느 순간 욕심이 되어버렸고, 경쟁에서 이기려는 모습이 극악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왜 일까? 그는 자신의 연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인정을 받고, 명성을 다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꿈이 도가 넘을 때는 욕심으로 변한다. 연기만 했을 때 행복했던 내가 누군가와 경쟁을 하여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과욕으로 번지게 된다. 리건 톰슨의 도전이 아름답지 못했던 것은 가족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성공을 위해 가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어느 순간 우리에게 꿈과 가족이 양립된 개념이 되어버렸다. 꿈이란 건 라는 개인의 크나큰 욕구이고, 가정이란 우리(서로)가 조금은 욕구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차이에서 그 둘은 양립되는 개념이 된 거 같다. 그 모습이 리건 톰슨을 통하여 아주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수단과 방법 속에는 가족이 있다. 그는 여러 가지의 마음이 부딪혔을 것이다. ‘가족은 날 사랑해. 그러니 나의 이런 면을 이해해 줄 거야. 난 명배우니까.’, ‘샘은 날 왜 싫어하지? 난 널 사랑해. ........ 이게 아닌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니야. 단지 난 내 꿈을 위해.......’ 이런 마음이 부딪히면서 꿈을 밀어붙이는 그의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멋진 배우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우리에겐 무정한 아버지로만 보일 뿐이다.

        영화는 리건 톰슨을 한쪽으로만 조명하고 있지 않다. 만약 꿈을 쫒는 노배우의 이야기였다면, 연극의 성공을 드라마틱하게 그리는 영화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드라마틱한 감동을 주는 구조는 아니다. 성공을 쫒는 그 이면에는 버림받은 가족이 있었다. 그 면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대단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임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리건 톰슨과 우리는 다른가? 아니다. 현실도 저렇다. 우린 영화를 통해 너무나 환상적인 세상만을 접해왔다. 아름다운 여배우와 잘생긴 남자배우가 연애를 하는 것,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고 악당을 물리쳐 세상을 아름답게 구원하는 것. 사실 현실은 이렇지 않다. 영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웅의 이면에는 뼈아픈 타인의 희생도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리건 톰슨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인생의 황금기에 포커스를 맞추며 살아간다. 그러나 더 중요한건 황금기 그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야 한다. 안 그러면 리건 톰슨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때를 대비하여 삶의 궁극적 가치를 찾는 여행을 해야 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하여 그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국, 리건 톰슨의 옆에 남은 진실은 샘과 그의 전 부인이다. 우리에게 진실은 명성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다. 우리의 행복은 그것에 있다. 사회적 성공이 있든 없든 우리는 어디서든 사랑받지 못하면 죽어가는 존재이다. 리건 톰슨은 영화의 마지막에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우리가 쫒는 그 모든 것은 한줌 모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영원하다.

     

     

     

    성공하려는 자(레슬리 / 나오미 왓츠)

        레슬리가 리건 톰슨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내일이면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요. 그리고 전 브로드웨이 배우로 거듭나겠죠.” 하면서 감격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 모두가 공감을 할 것이다. 성공하려는 자. 이 모습은 사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인생의 황금기에 포커스를 맞추어 살아간다. 레슬리 또한 무명생활을 참고 참아온 것. 그것은 브로드웨이의 명배우로 거듭나는 저 순간을 위하여 참고 참아온 것이다.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 대화 장면의 표정을 보아라. 저 표정은 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의 환희와 감격의 표정이다.

        성공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간다. 참고 또 참고....... 그렇게 꾸역꾸역 올라가는 것이다. ‘올라간다는 것조금은 나에게 낯선 단어지만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은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올라간다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성공이란 참 웃긴 놈인 거 같기도 하다. 높고 낮음에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성공이란 개념은 아주 단편적으로 개념화되어 있는 듯하다.

       성공하려는 자의 모습. 레슬리의 저 모습은 당연하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인생의 황금기란 무엇인가. 너무나 보편화되어있는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레슬리의 모습을 본 리건 톰슨의 감정은 어떨까? 그는 이미 모두가 말하는 성공을 겪었다. 그런 그가 바라보는 레슬리는 어떨까? 레슬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벅찬 표정은 아니다. 나도 저 과정을 겪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표정으로 보인다. 그도 할 말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알 수 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이 결코 성공이라는 단어로 정리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성공하려는 자. 레슬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쁨과 환희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 후 영화의 큰 맥락에서 성공하려는 자의 모습을 재조명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사랑을 원하는 자(/ 엠마 스톤)

        마지막으로 사랑을 원하는 자를 둘러볼까 한다. 영화에서 크면 크다고 느낄 수 있으며, 작으면 작다고 느낄 수 있는 비중을 가진 캐릭터 샘. 그녀의 초반 모습은 막장 인생의 단편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될 보석이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선을 통해 우리는 오묘하게도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필요로 했다. 버릇없는 행동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리건 톰슨의 무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리건 톰슨의 인생은 모두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자신의 딸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관심밖에 일이다.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위해 샘은 언제나 잔심부름만 했다. 그런 그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더군다나 샘의 어머니 즉, 리건 톰슨의 전부인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샘은 얼마나 큰 충격과 불안감을 느꼈을까? 그런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작용하여 지금의 샘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삐딱선은 내 눈에는 당연하다. 그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고 느꼈을까? 그래서 막나가는 것이다. 막나가는 행동은 두 가지로 보여 진다. 하나는 어차피 난 관심밖에 존재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모종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나에게 관심을 달라는 역설적인 면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달라는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한다. 그 중에는 폭력적인면도 있다. 샘이 까칠하고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나를 좀 봐달라는 무의식적인 표현일 수 있다. 그녀가 영화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변해가는 모습을 보아라. 그녀 자체가 나쁜 자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작은 관심을 필요로 했을 뿐이고, 조금의 관심이 오자 그녀는 그의 아버지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샘과 톰슨 모두 완전하지 못하다. 두 캐릭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다.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이란 존재하는 가? 그 기준과 절대적 개념은? 사실 가장 모호하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모두가 불완전 속에 존재하며 그러기 때문에 의견대립이 생기는 것이고,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둘의 모습을 보면 한 가지는 완전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톰슨이나 샘 둘 다 사랑이 필요했다. 그리고 불완전한 우리는 사랑이 필요하다. 톰슨은 사랑이 가까이 있었음에도 못 알아봤던 것이고, 샘에게 사랑은 눈앞에 있었음에도 얻질 못한 것이다. 영화는 점점 둘의 관계회복으로 이어져간다. 그리고 샘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결국 한 포인트였다. 리건 톰슨이 눈길을 가정으로 돌리게 된 그 포인트.(전부인과의 대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옛 추억을 떠올리고, 이해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 자신의 딸이 눈에 들어오고,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 그 포인트부터이다. 아주 단순한 포인트부터 둘의 관계는 오묘하게 아름다워 진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샘과 리건 톰슨의 대립은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다. 무엇인가 우리의 가정을 휘저어 버리고 말았다. 성공만을 외치는 세상에서 나의 시선은 좁아져만 갔고, 그것이 답인 듯 20년을 넘게 그렇게 살아왔다. 성공이외에 아름다움에 대해선 경험해 볼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요즘은 초등교육부터 영어교육에 박차를 가한다. 아이들이 꽃향기를 맡을 시간에 완벽하게 성공한 인생을 살기위한 준비를 한다. 그 성공한 인생이란 많은 돈을 버는 것이겠지만....... 인생의 모험은 없어졌고, 오로지 짜여 진 계획표를 따라가야 한다. 안 그러면 낙오자로 찍힌다. 그런데 사실 따라간다 해도 낙오자로 찍히기도 한다. 그 오류는 모두가 보지 못한다. 사랑이란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한 사람은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이득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리건 톰슨처럼 나이가 들어 힘이 없어지면 그냥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 패턴은 대물림이 된다. 그런 그가 자식을 낳을 것이다. 자신의 치욕스러움을 아이에게 주기 싫어 사회에서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게 조기교육을 할 것이다. 결국, 위에서 말한 초등교육으로 다시 넘어가 그 아이는 꽃향기를 맡을 시간에 완벽하게 성공한 인생을 살기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면 그 자식이 50~60대가 되어 힘이 없어지면 또 전락하겠지........

        우리는 샘을 품어야 한다. 순수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원하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찾아야 한다. 샘의 모습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샘을 숨겨두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마이크나 레슬리 같은 마음은 표출이 되면서 왜 샘과 같은 마음을 우리는 숨기는지 모르겠다. 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시기는 우리가 샘처럼 사랑을 위해 떼쓰는 사람이 되었을 때 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메마른 존재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단비를 맞아야 자라나는 존재이다. 성공만을 위한 삶이 아닌, 사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가치가 아닐까?

     


     

     


    가치 + 표현력 = 영화

       <버드맨>을 두고 롱테이크의 기술적 측면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너무나 협소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술적으로 뛰어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분만을 가지고 이 영화를 정리한다는 것은 이냐리투감독에게도 예의는 아닐 것이다. 그가 왜 그런 기술력을 발휘했는가? 이 부분이 더 정리되어져야할 것이며, 더 깊게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원테이크로 간다. 이것은 ‘Plan Sequence’ 그 이상이다. 물론, 중간 중간 끊어지는 부분이 분명 보이긴 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편집되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런 노력들을 생각해보면 감독이 얼마나 원테이크를 선호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런 질문이 들었다. 구지 저럴 필요가 있을까?

        구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삶은 컷팅의 연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자. 당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고 눈을 이용하여 장면을 자를 수 있는 가? 우리는 롱테이크로 현실을 살아간다. 구지 컷이 들어간다면 잠자리에 누울 때라고나 할까? 그러나 우리는 꿈을 꾸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던 우리는 시신경에 계속해서 장면들을 찍게 한다. 영화의 흐름을 보아라. 주인공들이 싸우는 장면이나 대화하는 장면들이 그냥 우리의 시선으로 연결되어져 간다. 만약 다른 감독이었다면 마이크와 톰슨의 싸움장면을 좀 더 박진감 있게 컷트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마치 누군가의 싸움을 구경하듯 찍어 놓았다. 그 외로도 모든 장면들이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듯이 찍어 놓았다. 이것은 영화의 스크린이 우리의 눈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영화 속 상황과 나를 연결시켜준다. 영화를 영화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현실로 느끼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영화에서 가장 사실적인 면을 끄집어내려 했다고 한다. 아마 그 부분이 너무나 잘 표현된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롱테이크의 움직임에 나또한 움직이게 되었다. 영화 속 연극 공연장을 나도 휘젓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영화로만 바라본 것이 아닌, 영화를 나의 현실과 함께 가게 만들었다.

        롱테이크는 배우들의 연기를 사실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감정 또한 편집에 의해 훼손된 느낌이 없었다. 영화라는 것이 재미있는 게 편집에 의한 연기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롱테이크는 이에 대한 반기를 든 테크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롱테이크란 배우를 믿기 때문에 쓰는 기법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좋지 않다면 사용할 수 없는 기법이다. 그리고 이는 더 큰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감정전달에 대한 조작이 가능한가? 까지 생각해볼 여지를 충분히 준다. 편집을 통하여 우리는 스릴과 충격 또는 감동까지도 어느 부분 조절할 수 있다.(영화 <양들의 침묵> 경찰이 집 잠입하는 장면 참조) 그러나 롱테이크는 감정조작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장의 감정을 전달하는 기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현장 그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가장 사실적으로 찍고 싶었던 이냐리투감독에게 롱테이크는 가장 사실적으로 현실을 담을 수 있는 기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뒤도 안돌아보고 풀 롱테이크로 찍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는 계산적으로 조작되어진 느낌이 없다. 감정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 흐른다. 모든 캐릭터들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감정의 변화가 조금씩 오는데, 영화가 롱테이크로 찍혀서 변화하는 과정이 시간 순으로 잘 보여 진다. 이런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롱테이크의 매력이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캐릭터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롱테이크와 함께 여러 캐릭터들의 대화에 참여한다. 각자 자신들만의 상황에 놓여 진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면 우리랑 크게 다를 거 없는 고민과 아픔이 있다. 어느 하나 나빴다고 할 수 없고, 어느 하나 잘났다고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진 관계 속에서 계속 끊임없이 부딪힌다. 롱테이크는 그 점을 아주 잘 포착하고 있다. 주로 리건 톰슨의 시점으로 롱테이크가 흐르긴 하지만 그 화면 속에는 톰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관점으로도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들이 섞여있다. 그는 레슬리와도 연결고리가 있고, 마이크와도 연결고리가 있으며, 다른 스테프들과도 연결고리가 있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가 주는 또 다른 의미는 마치 불교의 연기설과 같은 표현을 지닌다는 것이다. 컷트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 시켜놓는 것이 아니라 한 테이크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켜 놓는다. 영화가 끝났을 때 리건 톰슨의 연대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가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영화는 롱테이크를 가지고 관객과 영화 그리고 감독을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무너트려 버렸다. 그가 왜 이 기술을 사용했는지 가슴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조금 지루하더라도 영화의 내용을 은미하며 조금 천천히 <버드맨>에게 접근해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위로를 받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과 연기

        배우들이 연기를 한 것일까? 사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라는 것을 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은 그냥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대사 하나하나가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상황자체가 누구나 다 한번은 겪어보았을 법한 것이다. 감독은 배우들의 내면에서 를 끄집어 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재연시켰다. 배우들은 그 위에서 과거 혹은 현재의 자신을 살아갔을 뿐이다. 현장은 아마 연기를 다듬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나 자신의 모습을 살아가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연기는 그냥 동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여 졌다. 마이클 키튼, 애드워드 노튼, 나오미 왓츠, 엠마 스톤....... 이름만 들어도 위대해 보이는 이 배우들도 분명 영화와 같은 시간들을 겪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인간이다. 누군가에겐 아들과 딸이며, 누군가에게는 좋은 혹은 나쁜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다. 그들은 그런 자신을 연기했을 뿐이다. 왠지 애드워드 노튼이 연기에 물이 올랐을 당시에 영화의 마이크처럼 진실을 운운하지 않았을까? 왠지 나오미 왓츠도 레슬리처럼 첫 데뷔무대에 큰 꿈과 희망을 풍지 않았을까? 왠지 엠마 스톤이 지금도 아버지에게 저렇지 않을까?(아직 나이가 어리니 왠지 그럴 것 같다.)

       좋은 연기를 위해 덧붙여 꾸미는 것이 아닌, 조금 소박하지만 내가 보지 못했던 내면의 세계를 돌아보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표현 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버드맨>의 나오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하이퀄리티의 연기이다. 그들의 진심이 영화를 통해 잘 표현되어졌으며, 우리는 그 진심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마무리-

       <버드맨>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나 다 이 영화를 본다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버드맨>을 보고 위로받을 때이다. 지금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버드맨>을 보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영화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가장 좋은 '내면의 거울'이다. 나는 투명한 거울 하나를 추천한다. 바로  <버드맨> 이다. 당신의 삶에 있어 사랑의 가치를 투명하게 보게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다음영화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