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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윈터 슬립 Winter Sleep>'사람'과 '선'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5. 5. 16. 00:07

     


    윈터 슬립 (2015)

    Winter Sleep 
    7.7
    감독
    누리 빌게 제일란
    출연
    할룩 빌기너, 멜리사 쇠젠, 드멧 아크백, 아이베르크 펙잔, 세르하트 무스타파 킬리츠
    정보
    드라마 | 터키, 프랑스, 독일 | 196 분 | 2015-05-07

     

     

    <윈터 슬립>

    Winter Sleep

     

    - '사람'이란? 그리고 '선'이란? -

     

     

     

     

     

    한 권의 책과 연극 같이-

       이 영화는 한 권의 책 같은 영화이며, 또는 연극 같은 영화이다. 플롯의 배열이나, 쇼트의 표현력보다는 인물들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에 더 주목을 하면서 보아야하는 영화이다. 연극이 대사와 대사로 사건들이 이어지듯이 이 영화도 그런 연극적 요소를 가지고 진행되어진다. 화면 편집을 통한 극적인 연출이나, 색다른 형식을 찾기보다는 캐릭터들 하나하나를 깊게 생각하면서 접근해야한다.

       이 이야기의 원작도 안톤 체홉의 희곡이다. 그리고 안톤 체홉이 보여주었던 리얼리즘극에 알맞는 연출을 하였다. 영화가 지니고 있는 테크닉들을 최대한 배재함으로써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 노력한 모습들이 보여진다. 이런 연출력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뺀것이다. 무조건 많은 것을 채운다고 좋은 미쟝센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쩔때는 빼는 것이 최고의 '미'일 수도 있다. 동양화에서 여백의 미가 있듯이 말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지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영화는 굉장히 정적이다. 빠른 컷트 변화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엄청나게 지루하고 힘든 영화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 듯 또는 희곡집을 읽 듯, 이 영화는 보아야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도 책을 무척 좋아하지만 어쩔때는 지루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기준점이 작품의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아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지루하지만 꼭 읽고 곱씹어야하는 작품들이 있다. 나에게 있어 그런 작품들이 몇 있다.(파우스트, 순례자, 죄와벌 등) 조금 더디게라도 끝까지 잃는다. 그러게라도 읽어 나의 인생에 큰 위안과 깨닭음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건 좋은 작품이라고 불려질만 하다고 본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이다. 나도 조금 눈이 감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사들이 너무나 소중해져 눈을 비비고, 자세를 고쳐가면서까지 잠을 이기려하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다.

     

     

     

     

    '사람'이란?-

       이 영화를 보고난 뒤 떠오르는 질문은 '사람이란 무엇인가?'이다. 우리는 이 질문을 알게 모르게 되풀이 하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나를 둘러싼 갈등과 문제는 무엇인가?

     

       난 저 장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단순한 앵글일 수 있으나, 저 구도에서 배우의 표정을 보면서 마치 저게 '나'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란 저런 모습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그로인해 존경 받고 싶은 저 욕망의 눈! 그렇지만 자꾸만 생겨나는 갈등 속에서 한발짝 물러나 '난 잘못한게 없는데.'하며 살짝 움추려드는 저 자세. 무언가 굉장히 이중적인 자태를 뿜어낸다. 눈은 위엄있지만, 얼굴의 위치와 자세는 무언가 숨으려고 하는 듯하다.

       아이딘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결함과 오만함을 내뿜고 있다. 자신은 굉장히 겸손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에 그는 오만해 보인다. 그런데 웃긴건 정작 자신은 모른다. 아내인 니할과 다투는 장면에서도 그는 니할을 위한다고하는 행동이지만 무언가 오만해 보인다. 그 장면에서 더 아이러니한 것은 아이딘 자신도 분명 오만해 보이려고 행동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니할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일거다. 내가 저 모습을 보면서 느낀건 앞뒤가 맞지 않지겠지만 왠지 '그가' 이해가 된다는 점이다. 오만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보기 싫지만, 그의 속을 들여다보면 또 이해가 된다. 나참....... 영화를 보는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꾸물꾸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항상 이런 모습이다. 속과 겉을 모르겠다.

       아이딘과 니할의 다툼뿐만 아니라, 아이딘과 네즐리의 다툼에서도 그리고 함디선생님의 가족과 아이딘의 관계에서도 영화는 계속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본성을 보여준다. 아이딘뿐만 그런것이 아니다. 니할과 네즐리도 어찌보면 굉장히 모순적인 행동들을 많이 보여준다. 네즐리는 전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모순을 보여주고, 니할은 자신이 하는 자선사업과 다른 자선사업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보이며 분명하진 않지만 흐릿한 모순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자기 보호에 굉장히 능한 존재다. 자신이 위기의식이 느껴진다면 자신의 이익이되는 쪽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리고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합리화이다. 아이딘의 모습을 보면 딱 알 수 있다. 그는 말이 너무 많다. 속내는 그것이 아닌데 겉으로는 이러이러해서 간섭을 하는 거다라고 말하고 있다. 구지 말할 필요 없는데 말이다.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못한다. 너무 확고한 자신의 대한 신뢰는 나 스스로를 무너트리고 망가트릴 수 있다. 아이딘은 자신이 맞다고 확고하게 믿고있지만, 그를 바라보는 관객은 그가 답이 아니다. 영화 후반으로 갈 수록 그도 점점 삶을 해매고 있다. 확고했던 삶이 점점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 점점 쓸쓸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해 간다. 그리고 다시 니할의 품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 모순점들이 너무나 많다.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지키지만 뒤를 돌면 험담이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그부분이 너무나도 잘 그려졌다. 사람이 보여주는 모순점은 의심과 기정사실화에서 비롯된다. 사람에게는 이상한 습성한가지가 있다. 바로 추리를 하여 맞추고자하는 욕구이다. 아주 일부분만을 보고 많은 것을 판단하려는 인간의 습성은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인 의심을 낳고, 기정사실화로 인해 그 사람을 색안경 끼고 보게 된다. 너무나 아이러닉한 인생살이다. 우린 수 없이 많은 의심과 모순들과 부대끼면서 살고 있다. 그것이 사람인가?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하는 가? 영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선'이란?-

       '선'에 대한 심도깊은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역시나 이런 문제에서는 돈이 빠지지 않는다. 돈으로인한 문제는 국경을 초월했다. 아이딘(집주인)과 함디 선생님가족(세입자)의 갈등은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의 사정과는 별반 다를것이 없다. '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건 어떻게 이행되어져야 하는가?

     

       일단, 영화가 보여주는 '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영화에선 노골적으로 이건 '악'이야! 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관심이 지상 최대의 악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딘의 모습을 돌아보면 특별히 악하다고는 느낄 구석이 없는 캐릭터이다. 단지, 조금 말이 많고 오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직접적으로 누굴 헐뜯고 때리진 않았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의 모습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그런데 함디선생님이 그를 찾아왔을 때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찝찝하다. 함디 선생님은 배상금을 지불하러 온것도 있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말하러 온 것이기도 하다. 세입자들은 약간의 폭력을 당하였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아들인 일리야스는 목격한다. 그 이후로 아이는 집주인인 아이딘을 혐오하기 시작하며, 아이딘의 차에 돌을 던진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딘의 모습은 정말 어이가 없다. 물건을 차압해 가거나 약간의 폭력이 벌어진지 모르고 있다고 오히려 자신이 억울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는 자리를 피해버린다. 모든 것을 히다예트한테 떠넘겨 버린다.

       이런 모습을 보면 침묵과 회피가 어쩌면 치명적인 악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결국 모든 '키'는 아이딘에게 있었지만, 그는 책임회피식으로 자리를 피해버린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돈을 받아야한다는 강한 마음이 있다. 영화 첫 장면에서보면 "법은 없는 사람들 편이야!"라고 한탄을 하면서 부를 가진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모여준다. 그러나 그는 대놓고 마음을 표하진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이미지가 깍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조금의 양심이 움직였던가......... 그러나 욕심은 항상 연민을 이긴다.

       물론, 그가 집주인으로서 세를 받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정을 나몰라라하는 그 모습이 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너무나 많이 직면한다. 마음속으로는 연민의식이 마구 올라오지만 눈 질끈 감고 나몰라라 한다. 나 잘 살기도 바쁜 세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집주인은 집세를 조금 늦게 받는 다 하여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입자들은 당장 갈곳이 없다. 가진 자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진것이 죄라고 따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가진자는 조금 손해를 본다하여도 살아가는데 지장이없다는 것이다. 세입자들도 돈을 갚고 싶어한다. 나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린 그들에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주어야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나라가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한다. 우리는 왜 세입자에게 따듯한 한마디와 응원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들이 그저 게을러서 돈을 못 버는 것인가? 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너무나 많은 운도 따른다. 그리고 아이딘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물론,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돈 했겠지만 그도 결국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집을 세준거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안일하게 태도를 하는 것은 정말 사람이 가지는 최고의 모순이다.

       '선'에 대한 깊은 고민은 니할이 함디선생님 집을 찾아가는 씬에서도 나타난다. 함디의 친형은 니할이 배푼 돈을 그대로 불에 태워버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독자들은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정말 많이 궁금하다. 난 그 대목에서 '선'이란 물질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니할과 아이딘의 모습을 보아라. 그들은 '선'을 배푼다는 것이 단지 물질을 주는 것에만 국한되어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딘이 빈민촌의 표지판을 보고는 잠시 차를 멈춘다. 한참 그 표지판을 보더니 그냥 자기 집으로 가버린다. 결국, 그의 진심은 거기를 향해있지 않는다. 그것이 '선'인가? 돈을 많이 기부하고는 그는 말한다. "난 기부를 많이 했어! 그것도 익명으로!" 흠....... 글쎄 이 모습이 과연 합당한 모습인가? 구지 저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보여지려고 저런 말을 뱉지는 않는가? 진정한 '선'이란 드러내야만 하는 것인가? 그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판단해주길 바란다.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나'의 자각- 

       굉장히 일상적인 대화들을 배우들이 주고 받고 있으며, 관객은 그것을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있다. 카메라 구도 또한 굉장히 관찰적인 시선이다. 일상적인 영화속 대화와 다툼이 우리의 현실 생활에서도 있다는 것이며, 이는 영화 속 배우들이 처한 상황에 '나'를 대입시켜 보아도 크게 어색할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는 집주인일 것이며, 또는 세입자일 것이다.) 그러므로써 '그'와 '그녀'라는 3인칭의 관점에서 어느 순간 '나'와'너'라는 1인칭과 2인칭의 시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건 3인칭의 '그'와  '그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관찰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사람관계 사이의 모순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어쩜 저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영화가 점점 1인칭으로서 모든 상황이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나'에 대해 한번 더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모순이 3인칭의 '그'와 '그녀' 그리고 2인칭의 '너'의 문제가 아닌 바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안톤 체홉의 영향력-

       중요한 사건들의 장면이 화면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차압이나, 아이가 물에 빠지는 장면 등) 영화에서 중요하게 포커스를 잡고 있는 것은 어떤 사건을 대하는 캐릭터들간의 갈등이다. 사건 자체의 긴박감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캐릭터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는 체홉의 희곡에서 나오는 짙은 특징 중 하나이다. 그의 희곡에서도 중요한 사건은 실제로 보여지진 않는다.([갈매기]에서 뜨레플레프의 자살이 무대 밖에서 일어나는 등) 그러나 그 사건을 바라보는 캐릭터들의 심리에 포커스를 둔다. 물론, 그의 연극이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대에 다른 희곡들과 다르게 주제의식에 접근하는 방식을 새롭개 구성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자극적인 사건이 아닌,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시선이다. 체홉은 아마 그런 점을 자신의 희곡을 통해 꼬집은 것이 아닐까?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하여 안톤 체홉의 정신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기는데 성공하였다고 본다. 그런 포인트에서 생각하여 본다면 영화와 연극은 정말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다. 영화와 연극 모두 사람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무리-

       약 몇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여 이야기를 해보았다. 나의 관점에서 영화를 정리한 것이기에 동의 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다면 과감하게 댓글을 남겨주길 바란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서 보게되었다. 그런데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 영화를 가지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한다. 인간의 존재부터 '선'에 대한 질문까지. 이 영화가 우리의 삶에 조율을 잘 해줄것이라고 본다.

       살면서 꼭 한번쯤 볼 영화로 추천한다. 아, 참고로 매우 피곤한 상태에서 보면 굉장히 곤란한 작품이니 주의하길 바란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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