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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영화에서 보여지는 스타일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7. 10. 9. 14:24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Un film de 홍상수

     

     

     

    - 영화에서 보여지는 스타일 -

     

    서론-

       본다는 건 무엇이고, 믿는 다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의 엔딩크래딧이 올라옴에 스크린 위에 불빛도 꺼진다. 하지만, 내 머리 속에 잔상이 남아 아직도 이 영화와 함께 삶을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이것도 본 것이 끝이 아님을 말하는 것일까? 누군가 그렸고, 누군가 빛을 쏘아준 무언가를 나는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일까? 앞서 표현한 것처럼 아직도 잔상은 나에게 남아 풀 수 없는 문제들과 직면할 때 끝없이 이 작품의 장면들을 곱씹게 된다. 그렇게 나에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영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이렇게 긴 잔상을 남긴다.

       영화내용에 녹아있는 본다는 것, 믿는 다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이 질문들은 영화를 본다는 것으로도 연결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이 너무나 일관되게 만들어내는 영화의 표현력 자체도 그와 함께 맥을 같이하고 있다. 웰메이드(Well-made)로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우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는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의 삶과 영화가 하나가 되어 통합된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다. 감독이 이런 의도를 했을 진 모르겠다. 그게 어찌되었던, 그의 영화는 내용과 현실이 맥을 함께 한다. 그 속에 꿈의 세계가 흐르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다면, 그건 감독 본인의 본능이겠다.

       앞에서 너무 감성적으로 늘어놓았다. 다시 정리하여 본론의 내용을 축약해 보자면, 처음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은 홍상수 감독의 일관된 표현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 감독의 스타일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해 대화를 해보고자 한다. 둘째는 이 작품에서 녹아있는 질문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 우리의 삶과 과연 어떤 맥을 나란히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잔상을 남기고 아직도 이렇게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큰 두 가지의 카테고리로 굵게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표현내용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고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본론-

    표현방식에 대해

       ‘홍상수영화 같다라는 말이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것 같이 쓰인다. 그만큼 이 감독의 구도나 표현방식이 너무나 오랜 세월 일관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그의 표현방식 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흐름도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영화를 보러갈 때면 이미 영화의 그림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그리고 가끔은 여러 영화가 헷갈리기도 한다. 나도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그 후> 그리고 이 작품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장면이 조금 헷갈려 정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진부한 것인가? 그렇진 않다. 그 일관성이 좋아서 그의 영화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독의 표현방식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그리 매력적인 것이 될까?

       우선 줌(Zoom)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줌을 사용한다는 것은 사실 한국영화에서 크게 찾아보기 힘들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 줌이 도드라진 영화가 있었던가? 사실 많지 않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시작으로 줌을 생각하면 그의 영화가 떠오르게 된 것이지, 그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줌에 대한 표현력은 영화에서 크게 비중이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줌 기능은 오래전부터 카메라에 탑재된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영화에서는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줌은 무엇인가? (Zoom)은 렌즈의 광학작용이다. 빛의 굴기를 이용해 초점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렌즈에서 다른 렌즈로(예를 들어 10mm렌즈에서 30mm렌즈로) 전환을 하는 것이다. 이해가 더 쉽게 풀어보자면, 우리의 눈을 생각하면 된다. 눈의 각막이 카메라의 렌즈와 같다. 각막을 통해 빛이 굴절을 해서 들어오고, 망막에 피사체가 맺히며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고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런데 눈앞에 다른 각막(다른 렌즈)을 대보자. 가령 돋보기 같은 거 말이다. 그러면 보이는 현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줌 기능의 원리이다. 줌인(Zoom-In)을 한다는 것은 우리 눈앞에 돋보기를 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다. 예를 들어 15mm의 초점거리에서 70mm로 이동하게 되면 화각(시야)이 좁아진다. 그리고 심도도 얕아진다. 심도가 얕아진다는 것은 피사체를 제외한 배경의 포커스가 잘 빠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과장되게 말을 하면 딥포커스에서 쉘로우포커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줌을 한다는 것은 화면의 왜곡을 발생시킨다. 그건 렌즈의 굴곡에 따라 피사체가 맺히는 거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인터넷 백과사전을 참조)

       이런 줌을 이용한 영화기법이 그 유명한 줌인 달리아웃(Zoom-in Dolly-out) 혹은 줌인 트랙백(Zoom-in Track-back)’ 기법이다. 줌인을 통해 화각을 변화시키고 초점거리도 변화시킨다. 그렇지만 트랙백을 이용해 피사체가 커지지 않게 한다. 그렇게 되면 마치 배경이 피사체에게 다가오는 듯 한 느낌을 주며 그로테스크한 질감을 준다. 이를 가장 많이 이용한 이가 저명한 감독인 알프레도 히치콕이다. (영상링크참조)

       이제 왜 영화에서 줌이라는 기능이 많이 사용되지 않았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적이어야 하는 영화가 줌을 이용함으로써 그 사실감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프레임에 왜곡을 주는 줌은 사실감을 위해 자제되어 왔다. 필요한 경우 왜곡이 없는 트랙이나 달리를 사용했다. 트랙이나 달리는 카메라가 자체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화각의 변화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의 사실성, 그 곳에 내가 있는 듯 한 그 사실감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돈을 들여 영화관을 찾는다. 사운드의 변화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프론트에서 나오는 두 채널의 사운드보다 5.1ch이나 7.1ch의 앞뒤, 양옆에서 들리는 소리의 입체감이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줌은 사실감을 감소시키는 요소로서 치부가 되었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이 자제 된다. (줌과 달리의 차이 비교_영상링크참조)

       그렇다면 영화에서 줌을 대놓고 들어가는 것은 이 사실감을 박탈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줌은 특별한 상황으로서 사용되지 않는다. 아주 평범한 대화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들어간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와는 다른 지점이다. 그는 캐릭터의 정신분열적인 감정을 화면에 그리려고 특수한 경우 사용했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아주 평범한 상황에 들어간다. 또한 줌이 너무나 빠르고, 움직임은 삼각대의 움직임 그 자체를 그대로 담는다. 간단히 말해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기 때문에 화면의 인위성이 훨씬 도드라진다. 후반작업에서 그것을 알고도 빼지 않았다는 것은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의 의도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으로 유추해 보자.

     

     

     

     

       하나는 카메라의 존재를 인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와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의 해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영화에서 줌의 기능은 생각보다 캐릭터와 관객 사이를 낯설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캐릭터와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다만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건 하나의 감정에 너무 치우치진 않는 다는 것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영수(김주혁 역)와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줌은 생각보다 영수에게 집중되어 있다. ‘다중 샷에서 원 샷으로의 전환. 그것이 어쩌면 관객과 캐릭터의 낯설기보다 친밀감에 더 가깝게 만든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너무 치우치진 않는다. 그 이유는 줌의 방향이 고정되지 않는 다는 점 때문이다. 영수에게 집중을 했다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팬을 한다. 몇 번의 팬을 걸쳐 다시 영수에게로 돌아온다.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가 된다. 줌도 원 샷에서 다중 샷으로, ‘다중 샷에서 원 샷으로 빠졌다 들어갔다를 반복을 한다. 이렇게 줌은 한 감정의 이입을 돕기보다 여러 입장의 상황을 둘러보는 느낌을 준다. 캐릭터 감정에 들어갔다 빠졌다를 반복하며 한 바퀴를 도는 카메라 움직임이다. 그런데 사실 감정이 치우쳐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감독의 집중도를 간파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감독이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대사를 영수가 말할 때, 카메라는 영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너무 과하게 유도하진 않지만, 어찌 되었던 유도가 된다. 은밀하고 위대하게 유도가 되는 느낌이다. 다만 이 전개가 썩 불편하지 않은 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주시하게 만든다는 점 때문이다. 영수는 감독의 페르소나이고, 그를 둘러싼 상황을 한 바퀴 둘러보는 듯하다. 여기서 주변인들이 영수를 바라보는 표정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세 명의 표정이 다 잡히고 그들의 이야기와 영수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충돌된다. 그렇지만 그 모든 안티테제도 영수의 말을 설득력 있게 하려 하기 위함이다. 결국, 영수의 말이 그들의 반박으로 납득이 가기 시작한다. 여성 캐릭터가 오빠가 그렇게 순수했어요?”라고 물으며 그의 말에 약간의 동의를 보이는 장면이 있어 영수의 말이 설득력 있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카메라가 있음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 이 작품은 내 이야기라는 메시지가 은유적으로 들어나는 방식일 수 있다. 우리는 줌이 들어간 씬에서 알게 모르게 감독이 원하는 바를 집중시키게 만든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만약 줌의 왜곡을 느낀다면 그건 감독의 손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 이 이야기는 감독의 주관적 이야기라는 어떤 은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이 된다. 팬의 이동으로 시점을 바꾸어 많은 것을 품으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결론은 어쩔 수 없이 이건 내 이야기야.”라는 식의 대화방식이 된다. 영화라는 것이 100% 객관성을 가질까? 홍상수 감독은 사실 그건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다. 영화는 감독 자신이고, 그렇기에 주관적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최대한 조심히 접근 할 필요가 있다. 줌의 사용은 이건 영화야, 감독이 있어.”라는 식의 메시지를 들어내 관객에게 조심성을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 뒤에 감독의 핸들링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의견임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영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만, 영수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설득하려는 움직임은 더디다. 대신 영수의 개인적 생각과 주변 상황과의 충돌을 보여준다. 이는 줌이라는 기능을 통해 빠졌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며 상황들을 둘러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록 마지막은 감독의 페르소나인 영수에게 돌아가지만, 그것 또한 인위적인 줌과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감독의 자의성을 스스로 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최면에 걸리진 않는다.

     

     

     

     

       줌에 대한 위의 견해는 조금 엉성한 느낌이 있다. 그 이유는 영수가 친구들과 막걸리 마시는 씬에서만 느끼는 바이기 때문이다. 한 씬이 영화의 전체를 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엉성한 감이 있다. 그렇다면 줌은 왜 사용되었는가? 이번에는 조금 심플한 의견을 내보겠다. 그것은 컷을 나누기 싫기 때문이다.’ 막걸리 씬에서도 그랬고, 영화의 초반부에 박재영(권해효 역)이 카페에 들어오는 장면에서도 그랬으며,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랬다. 그것은 감독이 줌을 통해 관객을 집중시키게 만든다는 점이다. 재영이 민정(이유영 역)을 발견했던 눈빛을 약간의 줌으로 집중시킨다. 또한 두 캐릭터가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줌이 들어갈 경우 그 포인트부터 관객들은 대화에 집중을 하게 된다. 카메라의 변화는 분명 여긴 중요한 부분이야.’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딱 좋다. 그럼 반대로 이야기를 하면 감독이 원하는 부분에서 관객들이 집중해줬으면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볼 부분이 관객을 집중시킬 기술이 줌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감독이 관객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줌 말고 이라는 기술을 쓴다. 원하는 부분을 확대시키고 그것을 잘라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줌을 포함한 카메라의 워킹이 영화의 일부인 것처럼 움직인다. 그렇게 관객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컷과 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동시간이라는 차이가 있다. ‘은 같은 장면을 카메라 사이즈를 다르게 하여 여러 번 녹화한다. 그렇게 되면 레코드 버튼을 누른 시간은 한 장면이 흐른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각 컷들은 다 다른 시간성을 가진다. 녹화하는 순간이 매순간 다른데, 편집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시간으로 둔갑한다. 그런데 줌은 다르다. 줌은 녹화와 함께 흐른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샷 사이즈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이건 위에서 언급한 것과 역설적인 부분인데, 비록 카메라(혹은 감독)가 있음을 인지하게 하지만, 그 시간이 인위적이진 않게 된다. 약간 다큐멘터리적 접근이랄까? 어쨌든 그 현장에 감독과 이야기가 같이 흐르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컷으로 나누어 영화를 만들 때와 다르게 줌을 이용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한 번의 녹화로 마무리되게 만든다. 일정부분을 연기하고 녹화를 끊고 다시 이어가지 않는다. 줌은 그럴 필요가 없다. 줌은 녹화와 연기가 끝날 때 까지 같이 갈 수 있다. 아마 홍상수 감독은 연기와 감정의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쓰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즉흥성은 생명이다. 그런데 컷이 들어가면 계산이 들어가게 된다. 계산이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즉흥성을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그런 이성적 접근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건 그가 영화에서 관객을 집중시키고 싶은 부분은 있다는 것이고, 그걸 동시간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이다. “~ 그럼 어떻게 하지?” 감독은 이 두 가지효과를 얻고 싶은 작품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결론은 바로 이다. “그래, 그냥 줌 당겨!”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집요하게도 그의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보여 지는 것은 즉흥성이다. 그 즉흥성이 유지되면 한 씬 안에서 편집은 개입되기 힘들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줌도 즉흥성의 하나이다. 이 영화의 줌을 자세히 보면 약속된 움직임으로 보이진 않는다. 캐릭터들이 생각보다 뒤로 빠지면 카메라도 살짝 뒤로 빠진다. 이는 마치 켄 로치 감독의 <랜드앤프리덤>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그 장면도 예상치 못한 배우들의 움직임에 당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예상치 못한 배우의 움직임에 카메라가 빠르게 반응하는 듯 한 매끄럽지 못한 팬과 틸트를 보여준다. 이 또한 감독이 왜 줌을 썼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앞선 생각보다 이 부분이 조금 더 합당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런 즉흥성과 동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건 아마 영화의 진짜를 조금 더 확대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영화는 카메라가 있고, 그 기능을 사용한다. 영화적 혹은 카메라의 매체적인 특성을 적나라하게 스크린에 드러낸다. 그건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들과 함께 흐른다. 어쩌면 이는 카메라를 인지하게 만들어 인위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카메라를 통해 무언가를 탐구하는 사람의 모습을 진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 영화의 진짜는 관객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의 한 부분들을 들어내는 것이다. 기존 영화들에서 배우들은 픽션 안에서 진심을 다한다. 하지만, 짜여 진 대사 속에서 무엇을 진짜로 연기한다는 것인가? 진심, 진실, 진짜는 어떤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을 때, 그 순간에 튀어나와야하는 대사일 것이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도 약간의 상황이 주어져 100% 즉흥성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난해하지만, 그래도 순간 주어진 상황에 집중 있게 몰입하여야만 알맞은 말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배우가 그 사람이어야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 감정을 이해하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가지고 대사가 저절로 나와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대사라고 표현하는 것도 오류일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은 처음 경험하는 그 상황에 대해 생각과 말을 바로 그 순간에 창조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말. 진짜 언어를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어떤 움직임으로 그것을 담아야 할까? 그건 줌이라는 인위적 기능을 써서라도 그것들을 빠르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리고 녹화가 되는 그 시간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 그럼 관객들에게 무엇이 전달되는 것인가? 바로 배우들이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생각과 느낌, 그리고 그와 함께 생생하게 창작된 언어들, 그 현장에서만 나올 수 있는 최초의 단어들이 담겨진다. 감독은 그것을 끊을 수 없고, 그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조차도 영화의 한 부분으로 흡수해 버린다. 카메라의 끊임없는 움직임도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 움직이는 듯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카메라도 살아있는 듯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생각해보자. 카메라의 인위성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논픽션(Non-Fiction)으로 생각한다. 위 첫 번째 이야기와는 역설적이게 되지만, 이런 효과로 인해 이 영화는 어쩌면 더 리얼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에서 보여 지는 줌은 표현주의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사실주의로 다가오는 감이 크다.

     

     

     

     

       홍상수 감독하면 즉흥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유준상 배우가 예능프로그램에서 토로했던 것처럼 실제로 시나리오를 미리 구성하지 않고 촬영에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대사가 여느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어쩔 때 서로 말이 겹치기도 하고, 서로 언제 말을 꺼낼지 타이밍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대화 중간의 텀은 어떤 말을 던질지 생각하는 느낌도 든다. 말의 어순이 어긋나게 나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거기 있어.”라는 말을 있어, 거기에라고 말하는 식으로 글로 쓴 말 같지 않게 언어가 구사된다. 이건 즉흥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어순 일수 있다. 생각나는 말을 던지고 문장에 부족한 걸 채운다는 것은 짜여 진 대사가 있다면 불가능하다. 누가 주어와 술어가 잘 갖춰진 문장을 일부러 뒤집겠는가? 이건 없기에 가능한 어순이다. 그런데 관객은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에도 이질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건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아나운서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축약을 사용하거나, 어순을 쉽게 바꾸어 말하는 경향이 크다. 그렇기에 배우들이 영화 안에서 구사하는 언어는 이질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연기에 힘도 많이 빠져있는 느낌이다. 대사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상황 속에 섞이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대사가 씹히기도 한다. 계속 긴장감(Tension)을 유지하지 않아 흘리는 말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거슬리지도 않는다. 화려하지 않은 의상과 화면의 구성은 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와 엄청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조화는 우리에게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습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영수가 하는 말 중 인생 뭐 있어? 다 척이야 척.”이라고 한다. 이어서 요식행위라는 단어도 나온다. 이 말만 보더라도 홍상수 감독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요식행위나 어떤 이 아닌 진짜는 무엇이냐는 그의 집요한 물음은 연기를 컨트롤 하는 것에도 연결이 된다. 그래서 최초의 것을 담으려 하는 것 같다. 최초의 촉발하는 감정이나 행동은 지나가고 난 후에 다시 하려고 하면 스스로 가공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건 이 된다. 한 번의 행동을 두 번 반복할 때는 전자의 것을 의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고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최초의 나오는 그 순간일 것이다. ‘자동기술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렇게 연기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에 연연하지 않고, 배우들이 상황을 처음 맞이할 때 자연스레 나오는 말과 행동들을 그대로 담으려고 하는 집요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진짜 감정을 담고 싶었던 감독의 소망이 보인다. ‘이 아닌, 그 순간의 진짜 감정을.

     

       단일 쇼트에 대해서 구지 길게 말을 이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줌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미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카페장면은 컷이 나누어진다. 그런데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공간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공간이 허용하는 한 영화는 되도록 단일 쇼트로 한 씬의 이야기를 끝낸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즉흥성과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가공적이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단일 쇼트도 그의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방식이다.

     

     

     

     

       이렇게 줌, 단일쇼트, 즉흥연기의 표현방식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이 영화작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진짜를 위해 모두 차용된 것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같은 지향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그렇게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이 줌이 아닐까한다. 줌을 사용한다는 건 외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전위적인 시도이다. 줌을 이용한다는 건 포커스와 노출모드를 오토로 두고 촬영한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렌즈 mm의 변화는 조리개의 변화를 동반한다.) 영화에서 보았듯이 줌이 생각보다 빠르게 들어간다. 물론, 심도자체의 변화가 크기 않아 포커스 변화 폭이 넓진 않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 잠깐의 타이밍에 포커스와 노출을 수동으로 조작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오토기능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영화의 기존 질서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수동으로만 찍어야한다는 어떤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할까? 물론, 그거까지 의도한 거 같진 않다. 그러나 그의 단순한 시도가 영화는 이래야만 해라는 공식을 깨부수는 행위인 것은 맞다. 오토의 사용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단 줌의 즉흥적인 사용은 전형적인 영화적 언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기존 틀과는 다른 감독 본인의 아이덴티티이다. 무엇을 차용하던 기존 질서나 의례해야하는 그 모든 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내용이 그걸 외치고 있고, 제작 방식에서도 똑같이 외치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진심을 다해 만들어보면 될 것이다.

     

     

     

     

    내용에 대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적인가?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다. 그 이유는 민정이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민정이라는 캐릭터의 확실한 정리가 되지 않고,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가 정말 쌍둥이인지도 헷갈리게 된다. 영수와 그 주변인들이 가지는 상황도 독특하다. 있을 법한 이야기기는 하나, 특별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잔상을 길게 남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 왜 그런 것일까? 실제로 나의 여자친구가 쌍둥이가 되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한다는 감정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수가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반성하는 감정이나 민정을 찾으러 나서는 감정이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민정이 진짜냐 가짜냐를 맞추는 포커스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다. 민정은 하나의 상황이고, 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지켜보게 만든다. 사실 이 이야기가 시나리오 작법의 정석으로 흐르려고 한다면 민정의 정체를 추적해서 들어가야 하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반전처럼 해답이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민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시나리오 정석에는 반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가 불편하지는 않다. 이 영화의 내용에 있어 전제하는 것은 만약 저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떨까요?’라는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사건의 해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캐릭터는 왜 저럴까?’라는 질문을 만들게 된다. 관객은 사건 뒤의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영화의 구성이 관객들을 사건보다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의 구성도 대단히 박진감이 있거나, 큰 반전이 있지도 않다. 너무나 뻔하게 영수와 민정은 다시 만난다. 이 작품이 큰 잔상을 남기는 것은 영화적 스펙터클이 아니다. ‘본다는 것믿는 다는 것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상황 속에서 나는 만약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영수인가 아니면 주변인인가? 혹은 내 삶에 대입 할 수도 있다. 주변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나는 영수처럼 화를 낼까? 아니면 그녀를 믿을 것인가? 이 영화가 남긴 잔상은 이런 질문 그 자체이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삶과 너무나 관련이 깊은 것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에 공감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영수의 감정은 현실에서 진짜이기에 묘하게 이 영화가 친근감이 가는 것 같다.

       영수가 접한 상황과 갈등은 우리의 삶에 너무나 즐비해 있다. 어쩌면 삶은 저것이 다 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쉽게 예상하고, 쉽게 정의 내려버리는 사람의 모습. 그것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고 불화를 만들어내는 모습들. 감독은 그런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그리고 이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내용을 다시 크게 생각해 보면 초반에는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영수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를 더 넓게 확대를 하면, 보이는 것에 대한 모든 사회적 기준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영수가 화를 내는 대목도 생각해보면 주변인들의 눈을 의식한 것이다. 민정은 그런 영수의 모습에 실망을 했다. 민정이 욕을 내뱉는 순간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다. 그녀는 영수에게 친구들이랑 살라고 화를 낸다. 이 대목에서 보이는 것에 민감한 영수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영화가 후반으로 흐르면서 우리는 감독의 굵은 메시지를 보게 된다. 영수의 감정변화를 통해 보이는 것에 대한 하찮은 고집을 감독은 집요하게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요식행위으로 표현이 된다. 여기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다. 영수가 사랑에 너무 미친 거 같이 보일 수도 있고, 혹은 영수의 마음이 이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판단은 관객의 개인적인 경험에 맡겨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건져가야 하는 것은 영수가 말하는 보이는 것에 대한 무의미함이다. 그런데 이것도 보이는 것이 중요한 누군가에게는 싫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백미라고 생각하는 데, 그 이유는 밖은 모든 상황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지만, 저 작은 공간 안에는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 이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게 꼬여있다 하여도, 결국 사람은 저런 작은 공간 안에서 코어 같은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큰일을 이루었다 하여도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저 작은 공간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소박하지만 큰 의미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잘 생각해보자. 모든 공과 업적을 남기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하여도, ‘라는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싫은 소리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큰 업적을 행복으로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

       참 어렵다.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그 이유는 추상적인 걸 너무나 주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의견으로는 영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모든 걸 영수처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영수처럼 저런 사랑을 얻고 싶기는 하다. 나도 나 자신과 나의 것에 대해 잘 모르겠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이 영화가 혹자에게 매우 극단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밸런스를 가지고 접근해야한다. 무엇보다 감독 본인의 개인적인 삶이 침투되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가 되어버린 배우와의 교제는 이 영화 내용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쨌든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독과 대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한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사실 그들의 교제에 큰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첫째,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문제가 언론을 통해 이슈화 되어 영향력이 가해진 것이다. 이 감독에 대해 개인적인 부분까지 문서화되지 않았다면, 사실 그 감독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우린 알지 못한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는 알 필요도 없다. 그런데 기사가 되면 어떤 공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좀 웃기다. 사귄다는 것이 무엇이건데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지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내 연애에 관심가지는 것만으로도 정말 버겁다. 둘째, 폭력적이거나 불법적이지 않았다. 이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정반대의 이야기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같은 경우 범죄의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과 배우의 문제는 사실 불법적이진 않은 것 같다. 구지 따지자면 결혼한 남자에 대한 바람인데, 이건 이미 이혼제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합의하에 결론을 지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홍상수 감독이 범죄의 요소가 있었다면 나는 심하게 비판을 하고 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겠지만, 사실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이미 우리는 이혼을 많이 한 할리우드 스타의 팬이길 자청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민감한지 모르겠다. 셋째, 나이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걸 왜 우리가 관심가지는 가?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기 싫으면 내가 안 만나면 된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겨두자.

       그렇다고 내가 홍상수 감독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제를 우리의 삶에서 크게 비중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결혼을 했던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미화시키기도 싫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홍상수 감독은 너무나 큰 이미지를 부여하였고, 그것을 누군가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 같은 불안함이다. 물론, 감독 본인이 만든 이미지는 아니다. 감독에 대해 기사를 쓴 사람들이거나, 그를 추앙하는 어떤 세력이겠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보이는 것처럼 홍상수 감독은 그런 걸 바라진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주변이 이 감독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예술가는 꼭 저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 말이다. 나는 홍상수 감독의 이미지가 싫다. 나는 담배를 싫어하고, 술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맥주는 좋아한다. 하지만 조절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꼭 예술을 한다고 하면 너무 진부하게도 이 감독의 영화처럼 이미지가 그려진다. 마치 나도 그래야 예술가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너무 불편하다. 그리고 그의 연애가 무슨 세기의 사랑이라도 된 것처럼 그려지는 것도 좀 싫다. 이 부분은 관객의 입장으로서 조심하는 바이다. 그는 분명 결혼을 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결혼에 동의한 부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상대방의 피해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인과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 함부로 말은 못하겠지만, 불륜을 정당화 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크게 가질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들을 너무 죽일 사람들처럼 몰아가지는 말자는 것이다.

       이렇게 감독에 대한 아우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도 사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수와 같이 사랑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요식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수를 통해 보여 지는 대사들이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좋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감독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보여 지는 그의 표현력에 대해 분명이 할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고,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얻어가야 할 어떤 가치가 있음에 있다. 이 영화는 많은 요식행위가 없는 영화이다. 화면은 단백하고 배우들의 의상이나 장소도 굉장히 소박하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다. 우리의 삶은 그런 소박함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킹스맨과 같은 의상과 배경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지 않다. 그런 이 영화가 솔직하게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던지는 대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감독의 주관적인 시선이 많이 개입되었지만, 그것에 우리는 빠져들지 않는다. 영화의 표현력이 우리를 최면 걸지 않는다. 그렇게 비판하고 토론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이 영화에서 소박한 삶을 가져간다. 내가 너무나 많은 요식행위에 지쳐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꿈꾼 이상과 다르게 사회는 생각보다 본질을 벗어난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장일 수도 있고, 사회적 시스템이 그런 거 일수도 있다. 어쩔 땐 요식행위가 있어야 경제가 돈다. 그런데 왜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도 나에게 큰 숙제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도 이런 것들과 왜 부딪혀야 되는지 한편으로 씁쓸함을 남기게 한다. 왜 외국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인지, 그들의 선진문화는 왜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이 주는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 왜 많은 이들은 헤어져야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내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내 욕망의 일부가 영수에게 투영 되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힘차게 글을 써나간 것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감독에 대해 개인사까지 존경하진 않는다. 솔직히 난 그렇게 살기는 싫다. 하지만 감독이 말하는 진짜에 대한 탐구는 존경을 표한다. 그리고 영화를 그려내는 것에 있어서도 최대한 솔직하게 접근하려는 그의 모습이 좋다. 이 영화가 최고라고는 말은 못하겠다. 굉장히 주관적인 영화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대화하기 편한 영화이다. 그리고 계속 주관과 객관을 오고가며 생각해볼 영화이긴 하다.

     

    p.s.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내가 이렇게 이 감독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역설적이게도 이 감독의 아우라를 키우는 몫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주의해 주길 바란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며, 이 감독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 아님을. 그저 하나의 소견으로써 받아들여주길 바라고, 다시 이 글에 대한 비판을 기대하여 본다는 점을 알아주길 바란다.

     

    Wrt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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