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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맞은 욕정, 1958> 예술이라는 것에 스며든 손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7. 9. 14. 22:31

    도둑맞은 욕정

    Stolen Desire

     

    film by 이마무라 쇼헤이

     

     

     

     

    - 예술이라는 것에 스며든 손 -

     

    서두-

       드디어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일본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 내가 처음 선택한 영화는 그의 데뷔작인 <도둑맞은 욕정>이다. 제목과 포스터가 노출의 수위를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아서 뭔가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영화에서 노출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조금 있었다. 그러나 극장 밖, 나의 걱정은 너무나 헛된 짓이었다. 영화 포스터나 제목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오히려 로맨스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영화의 반은 웃음으로, 영화의 반은 어떤 테제에 대한 고민으로 90분을 지나간다. 이 영화는 예술에 대한 환희도, 물질에 대한 환희도 없다. 연극에 대한 심오한 예술세계보다 쿠니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찬양이 이 영화에서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본론-

       이 영화의 도입부부터 심상치 않다. 역사적인 사실을 다큐멘터리적인 표현방식으로 관객에게 던져준다. 오사카가 상업의 중심이 된 항구 도시라는 것, 전후 13년 재건을 상징한다는 것 등 당시 일본의 상황을 그대로 관객에게 던져주며 이야기는 커다란 부분에서 점점 개인에게로 좁혀진다. 이 대목은 영화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님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초대장부터가 이 영화의 성격을 잡아주는 듯하다. 이제 영화는 돈을 벌지 못하는 극단에게 초점이 맞춰져 이야기를 이어가게 된다.

       영화의 첫 시퀀스가 매우 웃기다. 그것은 란제리 쇼에 가까운 춤 공연이 있을 때 관객들(대부분 남자)이 넘치다가 본 공연으로 넘어가면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딱히 공연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들은 혼신의 연기를 펼치려 한다. 이런 컷들의 충돌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관객과 연극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 지도 씁쓸하게 보여준다. 자극적인 것에 반응하고 소비하는 관객들의 흐름을 뼈아프게 찌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소비패턴을 보여주는 거 같기도 한 이 첫 시퀀스는 영화가 웃음 뒤에 사유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을 본다는 것과 그것을 소비한다는 것의 차이. 우리의 욕구는 무엇이고, 소비는 어떤 욕구에 투자를 하는가에 대한 생각. 또한 전후 예술은 어떻게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도 이 한 시퀀스만으로 읽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여기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조금 더 아방가르드하게 전진한다.

       그 전진은 이 극단이 지방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시작을 한다. 지방으로 넘어가면서 극단은 뜻밖의 황금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한적한 시골의 재미가 없던 사람들은 극단이 온다는 소식에 너무나 기뻐한다. 그런데 극단은 돈이 없어 쉽게 막을 빌리지 못한다. 시골동네의 최고 부자인 사람은 싼 값에 막을 내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부자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좀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이다. 처음에 부자는 천막이 없다고 발을 뺀다. 사업에 대한 불안정성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높은 수요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점점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극단 배우들도 이만큼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분명 흑자를 볼 것이라고 설득을 한다. 결국, 부자는 막을 빌려주게 된다. 이런 감정 선이 보여 지기 때문에 극단의 시작이 유쾌해 보이진 않는다. 물론, 너무나 잘된 일이지만 투자자와 창작자의 관계 그리고 관객들과의 관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놔 그 관계성을 시사한다. 그래서 약간 뒤가 찝찝하다. 영화는 창작자 이면의 내밀한 사정을 그린 것이다. 투자자는 예술의 조예가 깊어 빌려준 것이 아니라 투자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성된다. 그것은 바로 뛰어난 예술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좋은 예술은 돈을 자연스럽게 부른다고 한다. ‘예술을 위하는 마음이(혹은 공부가) 선행한다면 분명 돈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바라지 않는 마음을 은근히 강조한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는 것으로 사고는 흐른다. 하지만 좋은 작품은 때론 경제적 가치를 뽐내지 못했던 때도 있다. 그리고 좋은 작품이라는 가치기준의 선도 모호하다. 그런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영화는 이 부분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질문이 약간 가리는 감도 있다. 그 이유는 정적이지 않고 유쾌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연극을 하게 된 극단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그런 관계성이 약간은 가려지는 감이 솔직히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 그렇게 흘러간다하여도 감독의 목소리에 큰 지장이 없다. 그 이유는 영화의 후반부에 극단의 변질이 보여 지며 그것을 더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언급한 질문들이 더 짙어진다.

       극단은 이제 돈을 많이 벌었다.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자부심도 높아졌으며 그와 함께 배우라는 아우라를 뽐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조금 웃기다. 사건은 오히려 그들이 부를 얻고 나서 시작된다. 여자를 납치하려는 극성팬들, 배우라는 어떤 아우라를 가지고 여자와 한번 자보려고 하는 남자배우, 연습은 뒷전이고 자신들의 인기를 만끽하고 싶은 배우들. 부가 들어오면서 은밀한 것이 스며든 기분이다. 이렇게 변질이 되어가면서 예술에게 있어 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영화의 전체적 구조를 보자. 불쾌한 사건은 극단의 성공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그것이 관객에게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이는 다시 큰 그림을 생각해 보게 한다. , 영화의 초반부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전후 일본은 경제적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나? 시골에서의 성공도 사람들의 말초신경만을 자극할 뿐(오사카의 공연의 관객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삶의 전체적인 지향 점을 바꾸지 못한다.

       극단의 인기가 높아지자 부차적인 사업들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몸에 좋지 않은 콜라가 생성된다. 감독이 괜히 초밥판매원과 콜라판매원의 장면을 심은 것이 아니다. 예술과 상업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한 결과로 그 장면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인기가 넘치는 예술은 우리의 먹거리도 지배해버렸다. 그것이 긍정적이었으면 좋겠지만 글쎄... “그거 몸에 괜찮아?”라는 할머니의 대사 하나로 긍정보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자아낸다. 잘 생각해보자. 우리의 멀티플렉스에서 팔고 있는 팝콘과 콜라, 과연?

       생각보다 예술의 성공은 긍정적 결과를 몰고 오지 못한다는 영화의 반전이 있다. 투자자의 관계 때문에 극의 실험적인 시도는 조심스러워지고, 배우들은 높은 인기에 어깨 뽕만 높아져 간다. ‘예술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한 질문과 함께 점점 짙어져가는 사유이다. 앞부분에 막을 빌린 극단의 환호가 관객들에게 심오한 주제를 못 던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언급했다. 왜냐면 이렇게 후반부의 스토리가 질문을 짙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초반부의 환호는 영화 후반부에 아이러니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예술에게 스며든 손이 있다. 그 손은 무엇인가? 과연 이런 예술적 행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너무나 많은 질문이 든다. 이렇게 영화는 예술의 성공을 보여주며 감독 본인이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게 비판적 칼을 들이댄다. 더욱더 전위적인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극단의 플롯과 함께 평행하게 흐르고 있는 플롯이 바로 쿠니다의 플롯이다. 그의 러브스토리가 이 영화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 쿠니다의 사랑은 구지 왜 필요했을까?

       사실 쿠니다라는 캐릭터는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보이듯이 그는 대학출신의 엘리트이다. 그리고 문학상도 꽤나 받았다. 자신의 친구들은 실력을 인정받아 방송국에도 진출해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같이도 거지극단에 남아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쿠니다와 친구의 대화에서 두 가지의 감정이 보인다. 그것은 순수예술에 대한 그의 열망과 어느 여인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전자보다 후자가 더 그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다. , 순수예술에 앞서 자신의 사랑이 더 그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감정을 조금 들여다보면 그는 언제든 극단을 떠날 수 있었다. 이곳이 순수예술을 하는 집단인가라는 질문도 수백 번을 던지며 극단에 대한 불편함도 가지고 있다. 떠나기를 매순간 결심하지만 그가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치도리의 얼굴이다. 그녀를 두고는 떠나기 힘든 것이다. 이런 캐릭터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 삶은 예술로 시작해 예술로 끝나지 않는다. 삶이 끊이지 않는 이상 예술은 계속 된다. 에자부로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그 지점을 느낀다. 그는 인기가 절정에 오른 미남배우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막사 안에서 조용히 자신의 예술을 위해 움직이는 시간을 가진다. 그 어떤 상황이 놓이더라도 예술은 계속 된다. 그것이 큰 스케일이건, 작은 스케일이건, 누가 봐주던, 봐주지 않던 그건 나와 함께 계속 된다. 그런데 삶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다. 쿠니다는 극단을 떠나서도 예술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도리 없이는 삶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이 삶과 예술을 생각하게 한다. 삶 속에서 우리가 진짜 알아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쿠니다의 러브스토리가 예술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해 연결시키고 그 셋의 관계를 생각 할 수 있게 한다. 글 서두에서 내가 쿠니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찬양이 이 영화를 더 아름답게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비록 치도리와의 사랑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에게 치구사가 있다. 이 영화가 끝난 후 쿠니다의 삶이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함께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와 그녀의 길은 희망찰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떠나는 쿠니다와 치구사의 모습이 그렇게 찬란할 수가 없다. 예술은 다시 이어가면 된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예술의 찬란한 영광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극단이 보여주는 변질과 쿠니다의 사랑이야기가 충돌하며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다른 테제를 던진다. 그리고 그것의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마무리-

       포스터와 제목이 보여주는 속임수는 마치 영화 속 란제리 쇼를 보는 관객과 우리를 하나로 합쳐버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약 이것이 감독의 의도라면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다. 이 또한 알게 모르게 스며든 손일까?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 영화의 마지막, 극단의 모습이 너무 코미디로 그려져 힘찬 미래를 예고하는 듯한 점이다. 그 부분을 조금 더 냉소적으로 그렸으면 어떨까 싶은 마음은 있다.

       그렇지만 영화의 전체적 구성은 이 영화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갑작스러운 장면들도 하나하나 감독의 사고와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이 오밀조밀 조합하여 하나의 큰 그림을 선사하고, 관객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짙게 던지고 있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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