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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1995) 왜 유토피아는 없는 가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7. 7. 6. 13:43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1995作

     

     

    film by 켄 로치(Ken Loach)

     

     

     

     

    - 왜 유토피아는 없는 가 -

    서론 -

       요즘 난 켄 로치 감독에 대한 심층 분석에 있다. 원치 않았지만, 우연히 찾아온 기회들이 켄 로치 감독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적극적인 사회파 감독인 이 감독에게 끌리지 않을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 집중되어 있는 감독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던 정말 우연히 맡은 발표에서 이 감독을 담당하게 되고, 그에 관한 자서전을 접하게 되고, 정말 우연히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접하게 되었다. 이것이 운명인지....... 나는 스스로 켄 로치 감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에 접어든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켄 로치 감독에 관한 작품이 꾀나 포스팅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글도 그의 작품에 대한 두 번째 글이다.

       켄 로치 감독의 몇 안 되는 역사극인 <랜드 앤 프리덤>. 이 작품에 대한 한 줄기 탄식은 유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것인가?”였다. 우선 유토피아라는 말의 정의를 먼저 잡고 가자. 사전적으로 유토피아(Utopia)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리스어 ou(없다)topos(장소)를 조합한 말이다. 그래서 없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를 조금 더 은유적으로 이 세상에 없는 이상적인 장소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토마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를 통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 유토피아는 없는 것인가?”라고 탄식한 것은 원어의 뜻을 보면 모순적인 말이 된다. 없는 장소를 없는 것인가?’ 하고 탄식하는 것은 논리에 어긋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의미 즉, 이상향에 대해 접근한다면 나의 탄식은 적합하다. 일반적으로도 우리는 유토피아는 천국이나 어떤 이상향에 대한 또는 파라다이스에 대한 접근이 더 크다. 난 그런 개념으로 이런 탄식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도 유토피아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질문이 든다. ‘유토피아(Utopia)’는 무엇인가? 뜬구름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이 대목이 켄 로치 감독의 굵은 영화철학이기도 한 것 이다. 추상적인 것을 현실에서 이야기해보자! 감독의 전체적인 필모그래프에서 두드러지게 나오는 대목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이다.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정치를 안건드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약속과 행동을 통해 국가를 운영한다. 그 약속이 설정되려면 정치적 행위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 약속이 우리가 꿈꾸는 또는 희망하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있다는 것은 구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것이다. (대한민국은 201759일 대선을 통해 몸소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대해 이 영화와 연관 지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이건 영화의 내용과 연관된 것이기에 본문에서 더 이야기를 하겠다.

       서론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개념을 조금 정리하고, 더 나아가 본문에서 그려질 큰 그림을 언급했다. 주의할 점은 이 글의 생각들이 편향된 사상으로. 혹은 정치적 프레임에 의한 왜곡된 시선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통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들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다. 좀 더 많은 고민과 다양한 접근이 있기를 바란다.

     

     

     

    본론 -

       켄 로치 감독은 왜 역사로 들어갔을까? 그건 현실의 문제를 위함에 있다. 루이스 오즈먼드 감독의 <켄 로치의 삶과 영화>에서 켄 로치 감독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지점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때의 결과가 달랐다면 지금도 달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상황들을 재연해 놓는 데 이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랜드 앤 프리덤>은 결국, 현재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 혹은 현재 우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영화를 제작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내전(1936~1939)은 진정한 좌파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좌파라고 불리는 진영 안에서도 서로의 입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소련공산주의(스탈린)와 손을 잡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분이 일어난다. 공화정안의 분열은 결국 프랑코에게 무릎을 꿇게 만들었고, 유럽전역에 우파의 기를 살리게 된다. 이렇게 공화정이 패배하게 됨으로써 좌파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말라가게 되는 것이다. 조금 헷갈릴 것이다. 나도 디테일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무조건 소련과 연결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글이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소련사람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공부해야한다. 마르크스는 독일 사람이고, 그는 부자인 친구 앵겔스를 따라 영국으로 가서 공장을 운영하는 일을 돕는다. 거기서 그는 노동자들을 관찰하게 되었고, 자본주의의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는 본인의 유명한 저서 자본론을 집필한다. 노동과 자본권력에 대한 관찰. 이것이 마르크스가 사유한 시작점이다. 그의 글들은 많은 곳에 영향을 주었고,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다시금 하게 하였다. 그 지점에 소련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남과 북이 이념으로 대치되어 있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반대되는 이론에 대해 정규교과과정에서 접하기 힘들다. 조금 언급이 될 뿐, 자세히 배운 적이 없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지금껏 마르크스가 소련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인터넷에 조금이라도 검색만 했더라면....... 10대와 20대를 무식하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진보가 무조건 2017년의 북한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난무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10>(1928)을 보면 알 수 있다. 볼셰비키혁명의 승리를 찬양하는 이 영화 속에서 여러 진보적인 단체들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는 사민주의도 있었고, 멘셰비키라는 것도 있다. 이렇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나 다양했다고 한다. 이렇게 비유를 들면 조금 웃기긴 하지만 한국 개신교가 여러 분파(장로교, 침례교 등)로 나뉘는 느낌이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물론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파를 만들고 갈라섰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중반에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론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공유하는 토론장면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저런 토론 속에서 앞으로 이 지역을 어떻게 운영해 서로 잘 살아갈 것인지 의논한다. 그렇게 의견을 나누다보면 토지에 대한 생각,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제각기 다양하다. 감독은 그 부분에서 땅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전작 <하층민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인간의 안식처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점을 느낄 수 있다. 토지의 사유화는 투기로 이어지고, 그 투기는 결국 집이 남아도는 데도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하층민들>에서 노동자들은 빈집에 무단으로 살게 된다. 이런 사유화의 모순을 그는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토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토지는 사유화가 가능한 것인가? 최초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토지는 누군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최초의 소유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누군가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집을 못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집이 서있는 최초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누가 그걸 소유해 팔고 또 팔고 그렇게 사고팔고를 반복하고 돌아서 지금 2017년에 와있다.(그렇게 한 가정이 집을 가지기 힘든 상황까지 왔다.) 하지만 땅은 지구가 만들어지면서 있던 거 아닌가? 우리는 그 땅을 밟을 자유가 있지 않는가? 모든 땅이 사유화가 되는 순간, 가진 거 없는 사람들은 공중을 날아다녀야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왜냐면 땅을 산 소유자는 자신의 땅을 밟지 못하게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토지가 사유화가 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자유는 박탈당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토지의 국유화를 외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반대 의견이 들어올 것이다. 토지의 국유화는 북한을 찬양하는 것 아니냐! 그래서 켄로치는 한국에 들어오면 종북감독이 된다. 여하튼 영화 속 단체가 이루고자했던 이상향(유토피아)은 토지의 국유화를 하나의 권력에 몰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토지의 국유화와 그것에 대한 분배를 민주적인 의사결정으로 이루어가려했던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과 비슷한 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강력한 권력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거기에 있다. 소련과 북한의 비슷한 점은 자신들이 주장한 노동에 대한 가치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앞세우게 된다는 점이다. 노동은 그들에게 하나의 도구였을 뿐 즉, 정치를 위한 하나의 미끼였을 뿐, 정작 본인들이 레볼루션의 선봉에 서서 무언가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혁명을 이루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을 참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민주적으로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력한 권력은 그들을 짓밟는다. 순수한 이상향은 영화 속에서처럼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진보에게 먹힌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진보던 보수던 구분을 가지는 것이 모호하다. 진보도 진보 안에서 갈라지고 서로 권력을 위해 먹고 먹히는 관계가 된다는 것. 이 알레고리를 알아야하는 것이 켄로치 감독의 영화를 제대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좌와 우가 확연하게 들어나서 둘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뼈아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이상향을 그리는 사람들 간의 충돌 그리고 권력이다. 혁명의 선두에 서고 싶은 사람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정치적 야망. 그런 진실이 유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것인가?”라는 나의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프랑코에게 승리하였다고 모든 것이 해결됐을까? <랜드 앤 프리덤>은 그 승리의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스페인내전의 패배가 좌파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상향과 권력의 관계를 속에서 좌파 내부분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켄로치 감독이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보진영 안에서 무너져가는 순수성. 우파의 승리보다 더 아픈 진실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재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알레고리이다. 토지와 자유에 대한, 다시 말해 인간존엄에 대한 생각은 신자유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현재 우리에게도 결려되어 있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켄 로치는 이 지점에서 과거로 가서 인류는 도대체 어떻게 달려온 것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을 스크린에 그려냄으로서 현실에 대해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것은 이분법적 구조로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이상향을 이루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진보의 분열은 현재도 진행 중이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구성도 손녀를 등장시킨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할아버지의 빨간 스카프를 하늘 높이 드는 행위는 손녀의 다짐이면서 감독 본인의 다짐이며, 앞으로 모든 인류가 이런 다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토피아와 정치는 뗄 수 없다. 그런데 정치적이면 안 된다. ‘정치를 통해이루어야 한다. 모두가 정치가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정치적 행위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고 다 같이 더불어 살길 바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쓰라린 아픔은 정치인이 되어 어떤 영웅주의에 빠져버리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 어떤 악보다도 인류의 가장 악은 바로 그런 욕망이다.

     

     

     

    마무리-

       <랜드 앤 프리덤>을 통해 바라본 켄 로치 감독의 작품 세계는 사실 확연하게 이분법적이거나 대립되는 구도를 가지진 못한다. 대립적 구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 시작점은 굉장히 모호하다. 그것은 서로 시작부터 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후에 글을 쓰겠지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이런 구조를 가진다. 그의 역사극에서 가지는 하나의 특이한 지점은 적과 아군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군이 둘로 나뉘어 대립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우리에게 모호성을 준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면 영화 초반 시퀀스가 아군의 승리 혹은 결실로 시작한다. 그래서 초반 시퀀스는 나름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가 아주 묘하게 숨어들어와 아군을 갈라놓는다. 그 순간 둘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물론 영화는 어떤 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둘이 갈라서는 지점을 켄 로치 감독은 토론장면을 통해 깊게 관찰한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분석하고 해석하며, 판단해야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혹은 무엇이 저들을 갈라놓았는지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여주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켄 로치 감독의 마음이 가는 어떤 한 시선으로 약간 치우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가 즐거운 이유는 어떤 야욕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바라본 시선은 언제나 실패한 무리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지를 너무나 담담하게(그래서 잔인함이 느껴지기도 하는)그려낸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나 실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힘이 없다. 진짜 굶주림은 민중들 안에 있는데, 정치권력과 손을 잡은 그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랜드 앤 프리덤>을 생각해보자. 신식무기를 가지고 스탈린과 손잡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POUM은 거부한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우리가 구식무기로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냐며 뛰쳐나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POUM은 굉장히 보수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입장은 스탈린과 손을 잡는 것은 본질을 흐리고 결국 그에게 흡수 될 거라는 차원이다. 이것도 논리가 안 맞는 것이 아니다. 결국 스탈린진영은 POUM을 내부의 반란단체로 만들어버리고 그들을 신식무기로 진압한다. 그들은 공화정진영에서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도우면 도왔지 헤를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 그들의 주장은 무차별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감독의 시선이 쏠리는 카메라 구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표현하는 실패자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카메라를 든 사람이 음지의 것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켄로치의 자서전을 보면 POUM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논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이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역사 왜곡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이어가는 여론이 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POUM의 존재여부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 이상과 권력의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는 건 흉내가 아닌 것 같다. 그저 과거의 흉내를 낸다면 돈을 많이 들인 공산품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고 공산품이 나쁜 것은 아니다. 역사를 리얼하게 배워가는 한 부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적 기능이랄까. 그런데 어쨌든 한 프레임이다. 감독은 그 프레임을 선택해야한다. 역사의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감독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앞선 글인 <퍼니게임>에서도 논한 바가 있지만, 결국 움직이는 사진100%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극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한다. 저 역사가 보여주는 알레고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보고 배워야하고 앞으로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감독은 역사와 현재를 이어가는 작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해야할 것이다. 이런 나의 주장이 완벽한 진리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나아간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영화가 만약 단순한 오락이라면 역사의 재미만을 강조하면 되겠지만, 만약 예술이며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건 단순함을 넘는 차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차원에서 <랜드 앤 프리덤>은 단순함을 넘는 작품이며, 영화의 존재가치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난 생각한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_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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