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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자 Okja,2017> 영화는 우리를 깨우고 있는 가?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7. 7. 15. 00:43

    <옥자>

    Okja,2017

     

    Dir. 봉준호

       

     

    - 영화는 우리를 깨우고 있는 가? -

     

    서론-

       그들이 칼을 들면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여론은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그들은 대한민국 영화의 선봉에 서있는 두 감독을 의미한다. 바로 봉준호와 박찬욱. 그들이 1년을 간격으로 작품을 냈다. 1년 전 박찬욱감독이 칼들 꺼내들었고, 1년 후인 지금 봉준호감독이 칼을 꺼냈다. 두 작품 다 알맞은 시기에 제작되어 칸영화제에 출품이 되었지만 메이저 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아가씨>는 미술상을 받아 기가 꺾이진 않았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심은 메이저급 수상이 불발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수상이라는 것이 영화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매기는 것이 아니기에 <옥자>가 나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수상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좋은 작품이라면 시대를 망라하고 존재할 것이다. 반면 이런 문제점은 있는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영화제에 나갔다는 식의 논리는 좋지 않다. 영화제는 국경을 초월하는 무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고로 봉준호감독이 국가대표선수가 되듯이 칸을 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영화제는 스포츠와 다르다. 그곳은 매우 주관적인 곳이고, 그와 함께 다양한 이야기가 소통되어지고 토론되어져야 하는 장이다. 그건 대한민국이라는 애국심이 작용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애라는 좀 더 광범위한 사고가 오고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감독이 수상을 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식의 사고는 매우 제국주의적인 사고에 기초한다고 생각한다. 그 점은 오히려 대한민국 영화판에 독이 된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수주의를 더 키울 뿐이다. 봉준호감독은 지구의 한 사람으로서 그곳에 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제작은 미국의 회사(넷플릭스)에서 하지 않았는가? 100% 국산도 아니다.

       서론이 길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영화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옥자>라는 영  화를 되도록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글을 써나가겠다는 것을 시사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영화의 세계 안에서 내 국적을 지울 것이다. 내 팔은 안으로 굽지 않는다. 그의 작품과 나는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이야기가 100%정의는 아니다. 그저 나는 같은 국적이라 하더라도 의문점에 있어서는 과감하게 들어갈 것임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런 다짐을 내보이며 이야기를 이어가보면 <옥자>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들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매우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상업영화로 본다면 매우 재미있는 영화이다. <옥자>옥자는 정말 귀여운 생명체이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감동도 있다. 가볍게 본다면 정말 좋은 소비이다. 하지만 뭔가 찜찜함은 남는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매우 가볍게 그린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정도 가지고는 실상 관객에게 문제에 대한 큰 경각심을 부여하진 못한다. 그래서 난 이런 판단이 들었다. ‘영화는 우리를 깨우는 가?’ 이 부분은 본문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본문-

       영화는 재미있다. 더불어 나름 진지하기도 하다. 봉준호감독 특유의 추격 장면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유머도 그의 영화답다. 너무 썰렁한 개그가 갑자기 치고 들어와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다. 트럭운전자가 자기는 4대보험도 들지 않은 알바생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사회를 비꼬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런 부분도 역시 감독 특유의 색깔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중적 사고를 보여주는 이야기의 구성도 나름 진지하다. 미란도 회사의 CEO가 인류를 생각하는 가치관과 ALF가 인류를 생각하는 가치관의 충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정말 정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포인트도 담겨있다. 더 시선을 끈 것은 ALF의 이중적인 모습이다. 단체 안에서의 내분 그리고 리더(폴 다노)의 폭력적인 모습과 ALF가 가지고 있는 사명의 어긋남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점은 진지해야 할 문제를 너무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가치관의 충돌은 이 영화의 전개를 위해 존재한다. 영화는 어긋난 가치관에 포커스를 두고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혹자는 한 개인의 가치관이 순수한 사랑을 흔들어 놓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개인의 가치관이 미자를 움직이게 했고 이는 결국 스릴 있는 추격씬으로 연결되게 만들었다. 옥자를 향해 돌진하는 미자의 사랑에 관객은 감동을 받는다. 이렇게 영화의 포커스는 어떤 산업의 문제보다 옥자와 미자의 사랑에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과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가? 라는 질문은 든다. 중요한 질문들이 피해가고 미자의 사랑만이 남는다. 미자와 옥자의 사랑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면 사실 비판의 칼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건 사랑이야기일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봉준호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축산업에 대한 비판의 날이 포함됨을 밝혔다. 그래서 나는 의문이 든 것이다. 앞에 내가 말한 중요한 질문이 피해간다.’라는 것은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GMO와 대량축산업은 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 부분을 빼먹고 있다. , 축산업에 비판에 앞서 선행해야 하는 것은 왜 축산업이 성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유이다. 그 비판의 시작점이 이 영화에서 녹여지지 않기 때문에 축산업은 옥자와 미자의 사랑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전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가볍게 느껴진다. 물론 영화가 무조건 무거울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면 좀 더 진지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의 문제는 인간의 욕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또한 GMO의 문제는 산업구조와 연결이 되어있지 않은가?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원료의 가격을 낮추는 경쟁을 한다. 한미FTA만 살짝 보아도 알 것이다. 왜 쌀에 대한 문제가 컸는가? 미국의 대량생산된 쌀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쌀보다 가격이 싸다. 그렇게 되면 국내의 먹거리 주도권은 미국에게 넘어간다. 소비자는 당연하게도 싼 제품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대량화된 농업이 질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을 보니 축구경기장보다 더 큰 땅에 헬기가 날라 다니면서 물을 뿌리고 농약도 친다. 그런 사진을 본 독자도 있을 것이다. 가격경쟁을 낮추는 것은 효율이다. , 유전자조작을 통해 씨를 개량하고 더 많은 양의 수확물을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원료의 가격은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같은 노력을 해서 더 많은 양을 수확한다면 자연스럽게 가격은 내려가게 되어있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이 생긴다. 그런데 그 품질에 대한 고찰이 있었는가? 이것이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옥자도 그중 하나 아닌가? 그 동물은 자연에서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이 된 동물이다. 이 영화는 옥자의 탄생과정을 너무 축소시켰다. 차라리 그 부분에 포커스를 두고 접근했다면 이 작품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문제의 핵심이 축소되거나 생략되어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혹자는 퍼레이드 장면에서 미란다사의 소시지를 먹는 모습을 통해 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에게 대항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이 영화전체를 통틀어 얼마나 비중이 있는가? 살짝 스쳐가는 몇 컷이 식량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지는 않다.

       ‘영화는 우리를 깨우고 있는 가?’ 종종 <옥자>와 같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지만 뭔가 겉핥기를 하는 식의 영화를 볼 때가 있다. 사회적 문제는 충돌을 위한 하나의 촉매가 된다. 그리고 끝나버린다. 많은 꿈을 가진 감독의 생각보다 이 영화는 너무나 많은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 전작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옥자>도 액션과 난무하는 유머가 영화의 반을 까먹는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매우 적은 분량으로 이야기되어진다. 그리고 그건 고작 몇 대사와 몇 컷의 장면으로 흘려보낸다. 이것이 <옥자>의 큰 아쉬움이다.

     

     

     

     

    결론-

       귀여운 동물을 만들었다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육식을 끊지는 않는다. ‘옥자인형을 들고 맥X날드로 혹은 버X킹 향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미자와 옥자의 사랑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산업이 있다. 그 산업의 형성과정보다 그 산업의 논리가 그들을 괴롭히는 데 포커스가 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해쳐나가는 미자와 옥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사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너무나 단면적으로 문제의식을 심어놓았다. 어쩌면 이것이 허영심을 키우는 작용을 하지 않을까 싶다. 부디 그렇지 않길 바란다. 그저 재미있게 소비되는 영화일 뿐이다. 더 큰 의미부여는 허영심만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너무 인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내가 느낀 솔직한 감정이다. 나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난 그 의견도 존중은 한다.) 누군가는 <옥자>를 보고 환경과 축산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ALF라는 단체에 대해 검색해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영향력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부디 이 기회를 통해 더 깊게 환경과 축산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행동으로 옮기길 빈다.

       어떤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예술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창작활동이 인류애를 위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창작을 하여 만들어 놓고 문제의식을 팔짱끼고 지켜만 보고 있다. 본인은 정작 고기에 술 한 잔을 걸치면서 논객이 된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며 어떤 대단한 아우라를 지니게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건 실질적인 행동아니겠는가?

     

     

     

     

     

    또 다른 이야기-

       배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옥자>에 대한 이슈는 영화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영화를 구성하는 환경에 대해서도 매우 뜨거운 이슈였다. <옥자>는 스트리밍서비스 기업인 넷플릭스의 제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넷플릭스는 스트리밍과 극장 동시개봉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멀티플렉스극장은 <옥자>의 상영거부를 했다. 넷플릭스의 행보는 칸영화제에서도 큰 이슈였다.

       이 부분에 대해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지만, 오늘 <옥자>에 대해 글을 쓴 것과 연결된 부분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이야기를 끝내고자 한다. 감독은 산업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산업구조의 찬성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에 대한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감독 본인은 산업구조 안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580억이라는 대자본을 통해 대형화된 산업의 모순을 그리고 있다. 귀여운 돼지를 그리고자하는 본인의 꿈. 이것을 창작욕이라는 거창한 말로 표현하는데 여하튼 이런 꿈을 위해 그에게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투자를 받았고, 그는 충분히 그 역할을 해냈다. 넷플릭스는 봉준호감독을 통해 극장을 구시대적인 생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을 성공했다. 넷플릭스가 멀티플렉스 3사를 괜히 건드린 것이 아니다. 3사에서 상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넷플릭스가 손해 볼 것이 없다. 일부러 건드린 거라고 생각한다. , 그들이 그리는 것은 빅피쳐(Big Picture)이다. 하나, 대한민국에 칸영화제를 보수적인 이미지로 만든 것. 하나, 극장을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만든 것. <옥자>를 보기위해 넷플릭스의 회원수는 늘어날 것이고, 이는 광고료와 연결이 될 것이다. 더불어 극장 때문에 불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다 극장관람료수익도 들어온다. 그들은 이래보나 저래보나 이득이다.

     

     

     

     

       넷플릭스가 문제인 것은 그들이 영상업계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극장이 사라지고 새로운 폼이 들어온다 해도 그것은 넷플릭스의 독점이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오기를 기대하며 주춧돌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반복 될 플랫폼의 독점이다. 극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플랫폼의 편리함은 인구의 반 이상을 점령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넷플릭스의 손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이 플랫폼의 영향은 분명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 영향력이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그건 지금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위험성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그 위험성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한다. 넷플릭스가 어떤 정치적 입장과 손을 잡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봉준호감독에게 내가 가지는 비판적 시선은 구지 580억의 돈이 아니어도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이다. 봉준호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창작욕과 자유를 위해서 그는 언제나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투자가 있어야 자유가 있는가?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본인은 그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알아야 할 것은 이번 투자로 넷플릭스가 순수하게 창작자를 도운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이익이 있기 때문에 도운 것이다. 창작자의 순고함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산 것이다. 이미 투자가치가 있는 감독에게 투자를 한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옥자>옥자가 세상을 바꿀까? 관객에게 즐거움을 줬다. 그래서 아주 좋은 서비스를 한 책임은 다분히 훌륭하다. 그런데 그런 스크린 뒤에 숨겨진 정치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미디어매체가 꿈틀대고 있다. 이 변화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옥자>가 보여준 대량생산. 그러나 <옥자>를 만들기 위해 든든한 방석을 마련한 대량 콘텐츠 스트리밍 사업. 그리고 그 사업을 통해 이어질 기업의 논리. 끊이지 않는 반복. 스트리밍 사업을 통해 만들어질 수많은 컴퓨터와 핸드폰들. 그리고 그와 연결되는 반도체산업. 끊임없는 전자파. 끊임없는 기계화. 그리고 끊임없는 국외기업의 국내유입. 그리고 끊임없는 위험한 노동. 또 다른 반도체 피해자....... 과연 무엇이 정의인가? 예술가 혹은 창작자라는 사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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