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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니게임>(Funny Games, 1997) 시선과 리모컨, 단 몇 가지의 포인트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7. 7. 3. 23:24

    <퍼니게임>

    (Funny Games,1997)

     

    Film by Michael Haneke

     


    시선과 리모컨, 단 몇 가지의 포인트 -

    *스포가 있음

     

    서론 -

       다시 글을 이어가 보려고 한다. 사람의 사고는 무한하며 이와 비례하여 영화의 세계도 무한하다. 시간은 끝이 없고 그 흐름에 따라 역사도 끝이 없다. 그래서 사람의 사고는 무한하며, 그에 따른 반응 양식도 다양하다. 그 밑바탕에는 개인의 경험들이 무한하며, 그래서 다양성이란 말이 성립 될 수 있다. 카메라는 인간의 행동을 기록하고, 그 행동은 무한한 경험의 밑바탕에서 싹을 트고 올라오는 것들이다. 그래서 또 다시 강조하는 것은 영화의 세계는 무한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다. 역사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한 영화의 롤도 끊이지 않는다.

       오늘 이야기 할 영화도 무한하고 다양한 영화의 세계를 입증하는 영화일 것이다. ‘어쩜 이렇게 불편한 영화가 있지?’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 다니는 영화 <퍼니게임>. 오랜만에 블로그에 돌아와 쓴다는 영화가 <퍼니게임>이라니........ 사실 좀 긴장이 된다. 나의 컨텍스트(Context)안에서 이 감독의 생각을 다 소화 할 수 있을지, 더불어 그런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조금 조심스러워 진다. 하지만 공평하게, 이 감독의 아우라를 다 걷어내고 오로지 <퍼니게임>의 첫 인상만을 이야기하면서 이 감독에게 접근해 보고자한다. 여러 기사와 글을 참고하였지만, 무엇보다 선행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작품의 첫 인상이며 그것이 주는 사유이다. 아무리 거장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우라에 취해 베이컨디럭스햄버거를 치킨버거라고 우기는 꼴이 된다면 작가주의라는 개념은 외골수 적이며 굉장히 권위적인 것이 된다. 그렇기에 <퍼니게임>에 대한 첫인상과 이 작품이 가져다주는 포인트를 살피면서 감독에게 서서히 접근해 보고자 한다.

     



    본론 -

       단 몇 가지의 포인트가 이 영화를 그저 불편한 영화로 만들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이 '카메라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과 '리모컨의 활용'이 그것이다. 스토리 밖으로 관객을 끄집어내는 이 장치들은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가 아님을 시사한다. 일단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중상층의 가족이 별장으로 휴가를 왔다. 그런데 불청객이 이 가족의 휴가에 접근한다. 계란을 좀 빌릴 수 있냐며 다가온 두 청년은 고의인지 실수인지 계란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가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가족과 청년들은 말싸움이 붙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청년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이 가족들을 감금하며 목숨을 건 게임을 시작한다. 결국, 가족들은 모두 이 두 청년에게 목숨을 잃는다.

       스토리만 보면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범죄 스릴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막상 포장을 뜯고 들어가 다른 물건이 들어있다.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는 느낌이다. ‘넌 낚였어.’ 이것에 우리는 당황하고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이 영화가 겉 포장지와 속이 다른 이유는 아마도 영화의 전체적인 은유나 혹은 비유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전체가 왜 은유이자 비유인가? 그건 위에서 언급한 포인트들 때문이다.

       초반부터 이 영화는 영화다웠다.’ 별장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스릴러의 느낌이 물씬 풍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구지 이 영화의 흐름을 깰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파울이라는 청년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마치 관객을 바라보고 대화하는 듯한 그의 시선과 대사들은 이 영화의 영화다움을 깬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 같다. 관객을 영화에 끌어들여서 더 영화 같았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스크린과 관객을 분리하는 전통영화의 문법에서 어긋나는 선택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픽션이며, 내가 만든 이 룰에 당신들은 참여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가 관객들에게 대사를 던짐으로써 저 스크린 속 상황은 실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짜여 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재현의 힘을 썼다. 관객은 관음적으로 실재 일어나는 것을 숨어 목격하는 것 같아야 한다. 스크린 속 연기자들은 관객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끼며 연기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무시한다. 파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 3자가 우리를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관음증적인 우리의 모습을 물밑에서 끄집어 올림으로써 우리가 그런 자세로 영화를 보고 있음을 인지하게 해준다. 그 인지는 저 영화는 허구라는 사실도 함께 입증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파울이라는 인물은 스크린 속에 있으면서, 스크린 밖에도 있는 인물이 된다. 스크린 안에서 <퍼니게임>의 룰을 이루고, 앞으로의 상황전개를 통제한다. 그리고 그걸 스크린 밖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려한다. 스크린 밖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창작자를 비유하는 듯하다. 영화의 전체적인 상황을 좌지우지하는 캐릭터 즉, 이 작품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사람. 그건 아마 감독 본인일 것이다. 파울이 리모컨으로 가지고 시간을 되돌리는 포인트가 이런 유추를 더 확고하게 해준다. 1초의 24개의 사진으로 된 지금 이 상황은 창작자가 원하는 상황으로 구성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영화라는 세계에 대한 역설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과거로 거슬러가 이야기를 더 해보고자 한다.




       옵스큐라를 통해 현실을 정말 그대로 그리고 싶었던 회화. 그 옵스큐라로 시작하여 사진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되고, 현실을 박제하는 사진의 기능에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현실그대로라는 건 움직임이 있어야하는데 사진은 정지된 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그 부족함을 채우는 발명품이 탄생했다. 물론, 그 이전에 조트로프라는 장난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림을 통한 움직임이었다. 실재 사람의 움직임, 우리의 생활상을 담는 것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그때 시네마토그래프(뤼미에르형제)와 키네토스코프(에디슨)가 탄생한 것이다. 1895, 프랑스 파리 그랑카페에서 첫 영화 <열차의 도착>이 상영되었고, 사람들은 기차가 카페로 진짜 돌진하는 줄 알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실재 삶을 화면에 담을 수 있다는 놀라움. 그것이 영화의 첫 시작이었다. 그림보다 사진을 볼 때 사실감을 느끼고, 사진보다 움직이는 사진을 볼 때 더 큰 사실감을 느낀다.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것은 리얼리즘의 대표이다. 그런데 <퍼니게임>은 이것에 역설을 가하는 영화이다. 파울의 행위는 영화는 현실 그대로를 담지 못한다.’는 주장을 은유적으로 하는 것이다. 파울의 행위처럼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건 현실그대로의 진실을 담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생각 혹은 의도가 가미된 것임을 보여준다. 패터가 총에 맞자 파울은 자신이 원하는 전개가 아니라며 리모컨을 돌려 상황을 바꾼다. ‘움직이는 사진의 편집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 부분을 통해 영화는 더 이상 1초의 24개의 사진이 흐르는 진실이 아니다. 영화는 조정자가 있는 1초의 24개의 거짓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네케 감독이 파울을 통해 관객들을 조롱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보고 싶다. 관객이 아닌 창작자를 조롱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한 다수의 리뷰에서 주장하는 바와 조금 다른 관점일 것이다. 나는 하네케 감독이 파울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관객들을 저렇게 곤혹스럽게 조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을 참조하여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실재 하네케 감독의 인터뷰 한 부분을 언급하고 이 단락을 마치고자 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1초에 24프레임의 진실이라고 말한 고다르의 아포리즘을 하네케 감독이 약간 개작하여 답변한 게 있다.

     

    영화는 진실을 서비스하는 1초간 24프레임의 거짓말이다. (웃음) 영화는 인공적인 건조물이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다시 건설하는 양 가장한다. 매우 교묘한 속임수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을 폭로할 수도 있는 거짓인 것이다. 만약 영화가 예술적 작업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솜씨 있는 거짓말의 공정에 불과할 것이다.”

    (출처: http://bubblegun.tistory.com/entry/미카엘-하네케 [stuck on all of B-movie])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돋보이는 인터뷰여서 공유하고자 했다. 그가 바라보는 영화는 저렇다. 그렇다면 <퍼니게임>속 파울의 행위가 더 잘 이해되지 않는가?

     



    마무리 -

       이 영화는 불친절한 영화이다. 사건은 있지만 무엇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지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거 같다. 장면의 자극점이 있지도 않다. 어쩌면 스릴러물과 다르게 조금 정적이기도 하다. 대화가 더 많고, 폭력적인 역동성은 떨어진다. 그래서 더 답답함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파울과 패터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관객들을 분노하게 한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 들어와 능청스럽게, 어떤 죄의식도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가지고 노는 모습에 분노가 올라온다. 그 앞에 저항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더 큰 답답함을 느낀다. 그렇게 이 영화는 불친절하고 불편하며 답답한 영화가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몇 가지 포인트들이 관객을 괴롭히려고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전체적인 비유와 은유로 구성되어 있어 사건의 통쾌함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파울이 던지는 포인트에서 영화의 전개에서 벗어나야하고 그 후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어떤 구조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파울은 미디어를 통제하는 누군가를 뜻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잔인하게 붙잡혀 있다. 구지 리모컨을 써서 영화가 픽션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효과를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퍼니게임>이라는 전체적인 은유와 비유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그 부분이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작용했다. 싸이코패스가 등장하여 칼부림을 하는 영화가 아니다. 미카엘 하네케는 <퍼니게임>을 통해 피 튀기는 잔인한 장면을 서비스 한 게 아니라 미디어만한 살인마는 없다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감독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속한 세계에 메스를 들이대는 꼴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영향 받고 있는 매체의 민낯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무엇이 옳은지 우리 스스로가 사유할 수 있다면, 창작자 스스로에게 메스를 들이대는 일은 그 어떤 것 보다 가장 아방가르드한 행위일 것이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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