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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그빌, Dogville> 악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7. 1. 23. 01:11

    <도그빌>

    Dogville

     

    Dir, Lars Von Trier

     

     

     

    - 악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

     

    서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언제나 충격을 몰고 온다. 말이 많은 그의 작품들이 세계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고, 많은 영화평론가 및 기자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유는 분명있다. 앞선 <님포매니악>에 대한 글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감독은 다이아를 찾으러 석탄 속으로 손을 넣은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은 매우 까맣다. 하지만 그는 단지 충동으로 손을 넣은 것이 아니다. 그가 직접 어둠으로 뛰어든 이유는 황홀경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 진실을 찾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의 겉표면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그가 내포하고 있는 지점들을 곱씹어 본다면 고통만을 위해 만들어진게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함에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일반적 개념을 파괴하고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파고 들고 있다. 그건 계급을 초월해서, 시대를 초월해서, 인종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악'이다. 우리는 이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나 부르주아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여성이나 남성이나 그 어디에나 비슷한 유형의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느끼게 된다. 영화의 시점도 3인칭으로 잡혀있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의 영향으로 보이는 연출은 이 영화의 목표지점을 탁월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본론-

       타지인에 대한 <도그빌> 사람들의 낯선 태도는 합리적이다. 누구나 외지인에 대한 의심은 있는 법이다. 그레이스도 그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톰은 그 부분에 매우 불쾌해 한다. 그는 그레이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우매한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은 매우 훌륭한 지성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외지인 그레이스를 보호해주려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톰의 행동에 먼저 주목해봐야 한다. 톰이라는 캐릭터는 '나'(또는 당신 또는 우리)와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톰의 성공기로 그려도 무색 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에게 감정이입을 시키지 않는다. 멀리 떨어져 톰과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레이스와의 관계를 '관찰'한다. 그렇게 관찰한 결과 톰은 결코 아름다운 청년이 아니다. 그의 행동속에서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뼈속 깊이 자리잡혀 있다. '교환법칙',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고 싶은 그의 마음이 구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게 된다. 그는 그레이스를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고결한척 다가가는 것이다. 지성인의 자세를 습득하기만 한 그는 체득하지 못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오만과 교만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만약 톰이 중간에 자신에게 거울을 들이 댔다면 상황은 달랐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이렇게 내면의 거울을 못 보는 법. 톰은 그 어느때나 너무나 평범한 선택을 한다.(아니면 너무나 교활한 선택을 한다. 자기 합리화와 같이 말이다.)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그는 도그빌 마을 사람들보다 더 잔인한 냄세를 풍긴다. 더 역겨움이 있다.

       톰은 누구인가? 그는 내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우리가 될 수도 있다. 그가 작가의 꿈을 꾸는 저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우리가 꿈이라는 것을 향해가는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는 괴롭다. 그 이유는 사회적 성공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낮은 자존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위로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시련은 내일을 위한 훈련이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부분을 틀렸다고 말해주고 있다. 결국 대다수의 이런 희망찬 환상이 톰이 보여준 '악'을 낳을 수도 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게 생각되어진 어떤 일련의 마음가짐과 행동들을 잠시 멈춰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이라도 멈춰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톰과 같은 악의 띠에 얽매어진 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만과 교만은 사회범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낮아지지 못하는 아주 평범한 그 모습에서 조차 악은 힘을 키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톰을 통해 '정'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부분들이 깨어진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통해 현실 속 나의 민낯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괴롭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고 지나간다면 우린 불안한 감정에서 탈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흑인과 백인의 위치를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모습도 보여진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겪는 일반화된 대결구도를 뒤집어 놓는 거라고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래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을 보수주의자로 몰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렇게 뒤집어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분법적으로 어떤 현상을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차별에 대한 부분이 아닌, 모든 경계를 넘어 지배욕(악)은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흑인을 비하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여성을 괴롭힌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남성도 악이고, 여성도 악이며, 흑인도 악이고, 백인도 악이다. 누구하나 선하지 않다. 심지어 그레이스(은총)도 그리 고결해 보이지는 않는다. 감독은 영화에서 사회전반에 깔린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영웅은 없다. D.W.그리피스 감독의 <국가의 탄생>(1914)은 KKK단이 흑인에게 포위 된 여성을 구하면서 백인을 높게 사는 기의를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구조가 전혀 없다. 구원자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그레이스마져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보수적 색깔을 띠었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넘어 악은 존재한다. 우리가 자유를 외치면서 투쟁한 그 모든 것에도 세상은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진보에서 조차 권력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누구는 과거의 투쟁을 자랑스러워해 현재에서 비리를 저지른다. 투쟁은 투쟁 후가 더 중요하다. 투쟁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닌, 무엇을 이루어낸 다음 그것을 어떻게 다듬어 갈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다. 그 도취가 우리를 좀먹는다.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쓰여지며, 그 역사는 우리에게 학습되어지고, 우리는 승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무조건 적으로 수용한다. 심지어 존경하는 마음으로 수용한다. 그렇다보니 나도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어떤 승리도 아름답지 않다.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승리에 올라가는 모습(톰) 혹은 참으니 복수 할 날이 오는 그 도취감(그레이스)은 이 영화에서 그리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는다.

       누군가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가 승리자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선택도 결국 아름답지 않다. 카메라는 위대하게 그녀를 그리지 않는다. 결국 참고 참은 마지막 악이 분출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선택이 보상으로서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에 당연시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선'을 위한 선택은 아니다. 붉게 타오른 도그빌. 거기에는 그레이스의 은총은 어디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가진자가 더 이상 그레이스하지 않다. 이 역설은 인간이 신을 닮아 갈 수 있느냐는 철학적 질문이 내포되어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은총의 개념이 무조건 적으로 주는 것이냐는 질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은총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 것인지도 보여진다. 이 부분에서는 마치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욕망에 가득한 인간이 즐비한 이곳에서 신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그의 은총마져도 저렇게 파괴적으로 변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과연 인간은 진정한 의미이의 '은총'을 그려나갈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도 든다.

     

     

     

       카메라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사고하게 된다. 갈등지점의 증폭을 카메라가 바라만 보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많은 사유를 한다. 물론, 감독의 주관이 완전하게 배제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감독은 스스로 던져놓은 상황에 여러 캐릭터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았다. 캐릭터들에게 각자의 신념을 주고(이 신념은 매우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특수한 상황이 닥쳤을 때 각자 성격에 따라 움직이게 풀어 놓았다. 그리고 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그것들을 기록한다. 이 영화의 성격은 이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레이스에게 감정이입이 될지 모르겠으나, 카메라의 구도들을 살펴보면 그레이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카메라는 그레이스와 얽힌 상황들 그리고 그레이스가 마지막에 극단적 선택을 하게된 계기를 매우 관찰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레이스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왜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되었나 또는 왜 그런 선택을 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는 탁월한 연출일 것이다.

       마을 한 사람에게 포커스를 두지 않고 멀리 떨어져 그들의 관계를 객관성있게 지켜보는 연출은 이 끔찍한 사건에 왜 생기게 되었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또한 연극무대를 활용하고, 그 위에 마인극을 하는 듯한 설정을 둔 것도 굉장히 다양한 관찰을 하게 만든다. 좀 역설적이지만 이는 더욱더 진실함을 느끼게 한다. 미술의 리얼리티를 높여 진실한것이 아닌, 신의 입장에서 미쟝센을 구축한 것이 어쩌면 더 진실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숨기는 것은 없다. 어떤 충격적 사건을 숨김으로서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식의 연출이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벽과 벽을 허물어 버리는 미쟝센은 관객들에게 모든 것을 오픈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충격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벽으로 가려진 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척의 아내는 척이 행한 강간을 벽이 가로막고 있어 보지 못한다. 하지만 관객은 신의 시선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벽을 관통해 범죄의 장면과 진실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한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꾸미지 않음으로서 '신'의 시선을 찾아내는 탁월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을 통해 쓰라린 진실을 마주하고 생각하게 된다.

     

     

     

    마무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도그마95'선언을 통해 파격적인 등장을 했음에도 스스로 그 규율들을 어김으로서 한편으로는 쓸쓸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그를 향한 여러가지 구설수들이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도그마95'의 규칙은 깨졌을지 몰라도 그 정신은 남아있다는 지점이다. 도그마95'의 규율은 그저 형식에 불과하다. 근본은 그들이 추구한 순수성 내지는 진실함에 있을 것이다. 이 순수성이란 영화형식에 대한 순수성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순수성이라고 개념을 확대해도 좋을 듯 하다. 결국, 그들이 이 운동을 한 이유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한 것이지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결국 삶의 순수함에 있었다. 영화에서도 보여지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그들은 운동을 통해 파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대중예술이라는 말로 기만한 자세를 보이는 어느 대자본(할리우드)에 대항하여 또는 '작가주의'라는 말 안에 엘리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움직인 것이 아니었을까? 할리우드와 작가주의는 대립된 모습을 보이지만, 우월함에 있어서는 같은 위치에 있다. 서로 대립했지만, 서로 영웅주의에 빠진것은 마찬가지다. 도그마95'선언에서 '엔딩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을 지운다'는 규율은 장난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다. 대립하는 둘의 모순을 타파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아주 작은 권력에라도 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이라는 칭호가 붙는 순간, 언제든 누구나 어깨에 뽕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 항목은 감독 본인들에게 들이대는 거울일 것이다. 대자본으로 장사를 하며 예술을 운운하는 것도, 작가주의를 외치며 엘리트주의에 빠진 것도 도그마 감독들에게는 남을 무시하는 비순수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형식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나 마음가짐 자체도 순수한 모습으로 내지는 솔직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도그빌>이란 작품도 매우 솔직한 영화일 것이다. 카메라의 테크닉은 기술의 힘을 빌리며 순수하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구상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삶의 보이지 않는 진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사에 조금이나마 순수성을 부활하고자하는 소망이 담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도그마95'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니콜 키드먼(왼)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오른)

     

     

       <도그빌>을 보면서 느끼는 강한 인상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마주해야 할 진실이 있다는 지점이다. 그것이 나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일 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지 않으면 '진보'라는 개념에 도달 할 수 없다. 언제나 '진보'를 왜치면서 자신을 영웅화 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의 모순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진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정'으로 두고 진보의 클리셰만을 따라간다면 변형 된 보수와 무슨차이가 있는지 구별하기 힘들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진실이 나의 거울과도 같다면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그런 지점을 많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답답한 현실, 참혹한 현실. 우리는 그것과 마주하고 대화해 나가야 한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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