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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레셔널 맨, Irrational Man> 이성과 비이성, 그 모호함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6. 8. 6. 09:07

    - 이성과 비이성, 그 모호함 -

     

    <이레셔널 맨>

    Irrational Man

    Dir. 우디 앨런

     

    *스포가 있을 수 있음

     

    서론-

       그의 이야기는 언제 끝나는 걸까? 1년 마다 작품을 내놓는 그의 열정은 언제나 놀랍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최고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하는 그 꾸준함은 작품의 수준을 떠나 엄청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를 찍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건 영화로서 표현 할 수 있는 삶의 폭을 끝임없이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쩔땐 너무 교훈적이고, 어쩔땐 너무 말만 많은 그의 영화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평들 속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간다. 비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 참된 영화인이라면 그 비평 속에서도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던 또는 품고가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은 확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난 우디 앨런 감독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특히 기대가 되었다. 제목부터 그의 진지함이 묻어난다. 그의 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진 주제의식인 이성과 감성이 충돌이 이 작품은 제목부터 대놓고 등장한다. 과연 어떤 충돌들이 벌어질지 제목부터 기대가 되어진다. (전년도 작품인 <매직인더 문라이트>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 흐름을 가진 것이 많이 걱정이 되긴 하였다. 그 마음을 품고 극장을 들어갔다.)

     

     

    본론 -

       영화를 보고 난 후 초반에 가지고 있던 걱정들은 한번에 날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게 되는 매우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 하였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현대판을 본 듯한 이 영화는 이성이 비이성으로 바뀌는 지점에 대해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성과 비이성의 사이를 모호하게 흔들어 놓는다. 어쩌면 Rational과 Irrational이라는 단어의 이분법적 관계를 철저하게 부순다. 여기 관객에게 던져지는 더 큰 질문은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사유지점이다.

       에이브라는 캐릭터를 잘 살펴보면 너무 많은 이성작용은 사람을 아이러니에 빠트리게 한다. 삶과 책의 내용은 너무나 다르며 '정의'와 '도덕' 또는 '윤리'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에 대해 만만치 않은 경험들을 하게 된다. 이성이 최고의 가치로서 작용 할 줄 알았으나, 그 이성은 오히려 우리를 늪에 빠트리게 한 것이다. 최고의 학문을 배운다고 많은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흐름들을 파악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우리가 바꾸기란 매우 힘들다. 학문을 통해 삶의 모순과 진실에 눈을 뜨게 되지만,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쉽지 않다라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왜 그런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에 대한 충돌에 대해 생각안 할 수 없고, 그런 생각이 커지면 인간을 증오하게 되는 단계에 까지 오게 한다. 에이브란 캐릭터도 글을 통해 배운 '정의'의 실현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했지만, 변화를 가진다는 것에 대한 큰 어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작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이 큰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 다는 큰 좌절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이성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아이러니는 현실과의 괴리를 통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도 모호해지는 모습을 이 영화는 그려내고 있다. 마치 「죄와벌」의 흐름 처럼 에이브는 살인을 하게 된다. 이 비이성적인 행동은 이성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합리화 하기 시작한다. 이 행동을 통해 그는 불쌍한 가족을 정말로 도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삶을 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다. 이성의 작용이 '정의'구현에 대한 욕구를 불타게 한다. 그리고 어쩔땐 그 극단이 비이성적 행동으로서 합리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그럴듯한 변명이 되며, 자신은 '정의'를 구현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스스로 얻고, 삶의 동기를 가진다. 이 흐름 자체가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을 어렵게 한다. 계몽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할 거 같았지만, 그 계몽은 어떤 다른 욕심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에이브의 살인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에이브가 정말 당당한 사람이라면 생명을 뺏어간 죄에 대해 당당하게 처벌을 받아야 그의 '정의'는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한다. 뉴스에서 이상한 용의자가 범인으로 확정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옥살이를 하기 싫어 피한다. 이것은 개인의 욕망이다. 그는 누군가를 위한다고 행동을 하였지만, (실제로 가족에게는 행운이 됬을 것이다.) 그 방법은 비윤리적인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처벌을 받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이것은 이성에서 시작해 비이성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합리화로 뻗어나가는 모습이다.

       계몽과 이성은 인간의 삶을 직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눈을 가지게 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나보다 낮게 보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냈다.(지배와 피지배가 되는 듯한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증오하게 만들고, 삶의 다양한 변화에 대해 반응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골때리게 한 대사는 '책과 삶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지점을 인지하고 학문을 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같은 굴레 속에서 에이브와 같은 실수를 반복 할 것이다. 이성과 비이성, 이 두 단어는 극과 극의 위치에 서있지 않다. 이성과 비이성은 종이 한장 차이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에이브라는 캐릭터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이성의 작용은 결국 비이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름 길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제목의 Irrational(비이성적인) 인 것이 너무나도 잘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마무리 -

       학문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눈을 뜬다는 것. 그것이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학문을 배우고 삶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이다. 가끔 철학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물론, 이론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것이 너무 극단이 되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무엇을 배우던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의 거리는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이브같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질'이라는 캐릭터는 관찰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에이브에게 빠져있었지만, 그의 비이성적 행동을 알게 되고 그와 거리를 둔다. 그녀는 환상에 젖어 있는 캐릭터는 아닌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은 질이 더 이성적으로 보인다. 이런 아이러니를 이 영화는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사유의 충돌을 캐릭터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유형의 캐릭터들이 나오고 그들이 충돌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이 영화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 이 영화의 완성은 이제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사고의 시작점을 쥐어 준 것이다. 그것을 관객은 꽉 붙잡고 진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칸트는 말했다. 인간 이성은 거부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할 운명이라고.. ' - <이레셔널 맨> 中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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