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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씨> 시대는 어디로?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6. 6. 17. 16:25

    <아가씨>


    Dir. 박찬욱


    - 시대는 어디로? -



    서론 -

       일제강점기 배경에 동성애라는 독특한 조합을 만들어냄으로서 영화는 개봉 전부터 관심이 뜨거웠다. 뿐만 아니라 노출에 대한 이야기도 개봉전부터 뜨거웠는데, 이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노출이라는 키워드를 빼놓으면 섭섭할 정도가 된 듯하다.(이것이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이 영화가 개봉전부터 시끄러웠고, 개봉이 된 지금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있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박찬욱 감독의 발언 때문이었다. "근대와 동양, 식민지 조선에 근대가 처음 도입된 풍경은 무엇인가 그 원형이 뭔가를 시각적으로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YTN뉴스 발췌)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이 인터뷰의 내용을 듣게 되었다. 너무나 흥미로운 말이었고, 박찬욱 감독이 칸영화제를 간것이 단순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되며 영화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시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시대는 어디로 갔느냐?'라는 의문만이 남게 된다. 프롤로그 부분에서만 일제강점기라는 것이 인지된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시대성보다는 인물의 감정과 관계에 의해 발생되는 사건에 더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속도감이 있고, 몰입도가 높다. 그러나 시대가 없어졌다.



    본론-

    - 지나가 버리다 -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것은 나쁜이 아니다. 하지만 사건만 남아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인가,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하나 하나 상호작용을 하여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건을 중심으로 가다보면 반응(이거 관객의 반응이 아닌 캐릭터의 반응이다.)에 기대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당연히 개연성이 충분 하지만, '왜 사랑하는 가?'라는 질문이 없이는 사랑을 다룬 영화라고 하기는 힘들다. 즉, 사랑이란 사건의 행동을 위한 하나의 작용으로서만 있는 것이지, 순수히 사랑에 대한 사유점을 표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을 위해 사랑의 작용이 있을 뿐이지, 사랑을 가지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영화는 아닌 것이다.

       이 영화도 같은 맥락이다. 숙희(김태리)와 아가씨 히데코(김민희)가 동성애에 대한 고민이 없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동성연애가 당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제강점기 안에서는 동성이라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이었나? 그런데 코우즈키(조진웅)는 일본사람이 아닌 조선인이다. 조선에서 동성애는 평범한 부분은 아닐 것이다. 지금보다 당시가 더 보수적이었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없다. "아가씨가 일본인이라 그래" 라고 반론을 할 수 있으나 그것도 좀 타장치 못한 것이다. 코우즈키는 창시개명을 한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갈등지점을 감독은 인지하지 못하고 다른 사건을 위해 스킵해버리는 현상이 보였다. 즉, 코우즈키와 아가씨가 대립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둘 사이에 갈등은 있다. 히데코(아가씨) 혼자 겪는 해방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두가지의 방향성이 보인다. 아가씨에 대한 해방(자유)을 기반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동성애에 대한 시대적 난관을 둘 것인가. 하지만 이 영화는 해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사건을 구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것이 꼭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요소가 되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하녀와의 탈출에 대한 개연성을 강하게 두기 위해 동성을 끌어들인 느낌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너무나 단순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나는 <로렌스 애니웨이>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또는 <캐롤>과 견주어 보고 싶다. 이 세 작품과 <아가씨>는 성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지만, 풀어가는 것이 상이하게 다르다. <아가씨>는 위 세작품과 비교해 보면 동성애를 활용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이 소재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게 한다. 긴박한 사건만이 남아 더 흥미로운 충돌지점을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 시대와의 충돌에 대하여 -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이 영화에서 일제강점기는 보이지 않는다. 미술과 의상에 있어서 일제강점기의 근대성이 드러나지만, 그 시대성과 충돌하는 지점이 없기 때문에 1920~40년 사이의 부유한 집안이라는 이미지만 남는다.

       시대를 두고 이야기를 구성하여 나갈 때 시대성이 주는 당시의 제도들이 드러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의상과 건축의 재현만이 그 시대를 대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너무 표면적인 것이다. 이 개념을 위해 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로마 무방비 도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전쟁에 의해 부서진 집에서 그대로 촬영되었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만 촬영이 되었다고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건 부차적인 것이다. 이 영화의 내용이 시대안에서 존재하기에 그 외적인 것들이 함께 가는 것이다. 세트를 짓지 않고 현장성을 위해 실제 그 공간에서 제작되었다는 것 만이 네오리얼리즘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공간성과 더불어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재현이었다. <로마 무방비 도시>에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의 재현이 동시대를 있게 한다. 물론, <아가씨>도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중요한건 이 작품이 다룬 시기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징이 굵은 한 역사적 맥락이고, 그 특징들이 나타나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를 가진다는 것은 그 특수성 안에서 고민을 한다는 것인데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의 특수성이 없어도 사실 이야기 구성에는 큰 무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재현을 해야하는 것이 능사냐고 반론 할 수 있겠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가 감독의 몫이라는 점이다. 이건 강점기에 대한 사유점이 없다. 코우즈키가 일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아주 짧은 대목을 통해 일본을 사랑하는 조선인이 왜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살짝 언급된다. 그러나 너무 살짝이다. 그 맥락도 뜬금이 없다. 너무 깊이 없이 보여주는 느낌이다. 영화 전체구성에 있어서 사실 없어도 되는 부분일 만큼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것을 주입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마무리 - 

       이 영화에 대하여 너무나 큰 비판을 한 것 같지만, 사실 아쉬움에 가깝다. 미술의 완성도가 높고, 이야기 구성도 재미있는데 결국 끝나고나서 남은 것은 '재미'밖에 없다. 재미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때문에 일제강점기라는 시절이 잊혀져 버린다. 너무나 슬픈 현상이다. 그 누가 이 영화를 보고 일제강점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는가?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소수일 것이다. 그건 영화의 카메라가 포착한 지점들이 그렇기 떄문이다. 나쁜 영화가 아니다. 단지, 일제강점기에 대한 더 깊은 고민과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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