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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함 포템킨> 충돌 몽타쥬의 교과서
    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5. 8. 13. 11:44

     


    전함 포템킨 (0000)

    The Battleship Potemkin 
    8.3
    감독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
    출연
    알렉산드르 안토노프, 블라디미르 바르스키,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 이반 보브로프, 미하일 고모로프
    정보
    드라마, 전쟁 | 러시아 | 75 분 | 0000-00-00

     

     

    <전함 포텀킨>
    - 충돌 몽타쥬의 교과서 -

    Film by Sergei M. Eisenstein


     

     

    서론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심오한 주제에서 약 두가지의 큰 갈래가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쟝센 이론' '몽타주 이론'일 것이다. 둘 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각자 고유의 성격과 방향성에 따라 이렇게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구지 가르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큰 그림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 <전함 포템킨>이란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이론은 바로 '몽타쥬(Montage)'이다.

       그러다면 '몽타쥬(Montage)'란 무엇인가? 한국말이 아닌 이 단어에 대한 사전적의미는 '짜집기', '조립', '맞추기'등의 의미를 가진다.(이는 불어랑도 같다.) 촬영한다는 것은 시나리오의 흐름대로 찍는 것이긴 하지만, 실상 촬영되어 찍히는 필름들은 연결되지 않는 조각들이다. 시나리오의 흐름을 완성시키는 것은 모든 촬영이 끝난 후 연결되어지지 않은 필름들을 이어 붙일 때 완성된다. 이것이 Montage(짜집기)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해 '편집'을 말하는 것이며, '몽타쥬 이론'이라는 것은 '편집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편집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몽타쥬 이론이란 단순히 편집을 잘하는 방법을 이론화 한 것인가? 꼭 그런것은 아니다. 이건 좀 더 포괄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편집을 잘한다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다. 편집구성의 방향성은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 편집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 뭐하다. 누군가는 서스펜스를 위하여 필름조각들을 구성 할 것이고, 누군가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름조각들을 구성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조각들을 나열 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방향성이 있다. 그러므로 편집이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며, 이것이 '답'이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지금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전함 포템킨>을 통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생각한 '몽타쥬 이론(편집 이론)'의 한 부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젠슈테인 '몽타쥬'란 무엇이었을까? 이 글의 본론은 이 질문에서 시작이 되어진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 1898 ~ 1948)

      

    본론

     

    - 레브 쿨레쇼프의 제자들

       몽타쥬에 대한 깊은 사고는 소비에트학파의 주축을 이룬 '레브 쿨레쇼프'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젠 거의 고유명사로 자리잡은 '쿨레쇼프 효과'는 그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데, 그의 제자 중 한명이 바로 에이젠슈테인이다.

       그렇다면 '쿨레쇼프 효과'가 무엇이길래 그의 제자들이 어떤 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가 실행한 실험을 통해 얻어진 효과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컷과 컷의 충돌로 다른 의미와 정서가 생긴다.'는 것이다.

       무표정한 사람의 얼굴 한 컷을 가지고 맛있는 음식의 컷과 죽은 사람이 있는 관을 보여준 컷을 각각 붙여보았다. 이때 그 사람의 무표정에서 각각 다른 감정이 발생된다.  음식을 연결한 쇼트는 그 사람의 표정이 무언가 배고픈 것처럼 보이고, 관을 보여준 쇼트에서는 그 사람의 표정이 슬퍼보인다. 설명이 충분할진 모르겠으나, 이것이 쿨레쇼프가 편집이란 것을 통해 발견한 것들이다.(쿨레쇼프 효과 참조)

      

       쿨레쇼프는 이것을 통해 약 3가지의 정의를 내린다.

      

       첫째 _ 편집을 통해 감정을 창조해 낼 수 있다.

       둘째 _ 편집을 통해 배우를 창조할 수 있다.

       세번째 _ 편집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컷과 컷의 충돌로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 점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접근성을 구체화 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두 방향성으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연결 몽타쥬'이고 하나는 '충돌 몽타쥬'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충돌 몽타쥬'를 성립시켰다. 여기서 <전함 포템킨>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충돌 몽타쥬'이다.

     

    - 충돌 몽타쥬 (Montage of Collision)

       '충돌 몽타쥬'란 말그대로 '쇼트와 쇼트의 충돌을 강하게 주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편집에 변증법을 차용하여 이 이론을 구체화 하였다.

       변증법은 '정(正)'이 있고 그것에 대항하는 '반(反)'이 있다. 그것이 충돌하여 다시 '합(合)'을 이룬다. 이는 철학과 논리학에서 쓰이는 말인데 어떤 것을 인식하는 법칙같은 것이다. (변증법 참조) 여기서 골자는 '정(正)'이 있고, 그것에 대항하는 '반(反)'이 있는데 대조되는 그 둘이 충돌되었을 때, 어떤 '합(合)'이 생긴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그는 영화로 가지고 왔다. 즉, '정(正)'의 샷을 하나 두고 그 뒤에 앞에 것과 반대되는 '반(反)'의 샷으로 구성한다. 그러면 두개의 대조가 심한 컷트들은 자연스레 충동하는 효과를 준다. 그리고 그것을 본 관객은 자연스럽게 극과 극의 상황을 머릿속에 충돌시키며 어떤 사고나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편집이론에 변증법을 적용시킨 논리이다.

     

     

     

    - 영화에서 나타난 에이젠슈테인의 특징

     

     *충돌의 충돌

       <전함포템킨>의 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혁명극에 가까운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어떻게 표현되어지는 지에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변증법을 통한 충돌 몽타쥬 문법을 자신의 영화에 적용시킨 에이젠슈테인은 이 영화에서도 정부의 편인 경찰(정)과 반란군(반)의 쇼트를 계속해서 대조시킨다. 이런 극과 극의 상황 대조가 굉장한 공포와 혼란을 가져다 준다.

       너무나 유명해진 오데사 계단 장면은 프레임의 수평을 꺽어버리면서 컷과 컷의 충돌을 가중시킨다. 뿐만아니라 계단을 내려가는 유모차가 아슬 아슬한 장면을 보여주며 계단에서 죽어가는 소시민들의 모습이 계속 교차로 보여진다. 그리고 유모차가 넘어지니 다음 쇼트에서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잡고있던 어느 할머니의 얼굴에 피가 뭍고, 안경이 깨지며 죽어간다. 그러면서 다시 진압하는 경찰의 무리를 계속 교차한다.

       <전함 포템킨>에서 저 한장면 만으로도 에이젠슈테인이 쇼트와 쇼트를 강하게 충돌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심지어 프레임의 수평을 꺽어가면서까지 혼란을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소시민의 대한 분노는 더욱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쇼트의 저런 대조와 충격이 아니었다면 아마 미비한 혁명극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형식적인 편집이론이 가미되면서 영화는 분노를 참지 못하게 만든다. 그는 이렇게 충돌의 충돌을 영화 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관련없는 소품들의 재창조

       전함인 포템킨이 반란을 일으키는 포화소리를 낸다. 반란군의 발포에 의해 건물들이 부서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갑자기 사자 동상이 약 3컷 나오는데, 첫 컷에서는 엎드린 사자, 두번째는 반쯤 일어난 사자, 세번째는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으로 컷트가 이어진다. 짧고 강하게 이어지는 이 컷은 반란군의 포효를 상징하는 듯, 이야기 흐름에 갑자기 삽입이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을 준다. 그러면서 계속 경찰(정)과 반란군(반)의 모습이 대조되어 쇼트가 연결이 된다.

       이 장면을 통해<전함 포템킨>에서 보여지는 에이젠슈테인의 충돌 몽타쥬 특징이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충돌를 위해 때론 스토리와 전혀 무관한 어떤 소품이나 상황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데사 계단에서 '유모차'는 그 상황에 있지만. 사실 사건이랑은 좀 무관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극 상황 속에 존재하는 소품이기에 확실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다음 장면인 '사자상'을 눈여겨보자. 이 사자상은 스토리와는 전혀 무관한 쇼트이다. 사자상이 극 중 인물들에게 주는 어떤 영향력이 없다. 스토리의 소재도 아니다. 그런데 이 사자상은 편집에 의해 재창조 되고, 극 중 상황에 은유적인 포효를 나타내고 있다. 편집에 의해 포효하는 사자가 된 이 사자상 장면은 반란군의 분노를 대변함과 동시에 감독의 의도를 표현하고 그로인해 관객에게까지 그 정신이 주입 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충돌 몽타쥬 이론에서 나타나는 추가적인 특징 하나는 이런 사자상 장면으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충돌 몽타쥬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충격을 위해 극과 무관한 소품의 등장, 그리고 편집에 의한 재창조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편집에 의해 충격의 조화를 이루어 관객에게 감독의 의도를 강하게 전달함에 있다.

     

     

     

     

    마무리

       <전함 포템킨>이라는 영화를 통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편집 이론인 '충돌 몽타쥬'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을 너무나 방대하고 깊게 들어 갈 것이 많다. 또한 몽타쥬에 대한 구분도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충돌 몽타쥬'의 도입과 간략한 개념 그리고 그것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골자만을 살짝 다루어보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굉장히 학문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며,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본다. 물론, 후대에 극단의 형식주의자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가 영화의 언어를 하나 만들어낸 것은 실상 부정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느 누가 저런 변증법적 개념을 샷과 샷의 구조로 가져올 수 있었겠는 가?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전함포템킨>을 통해서도 보여지겠지만, 그의 편집이론과 그것이 적용된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봐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우리에게 살갑지 않다. 그런데 저 당시, 세계역사의 변동기에서 그가 할 수 있던 최고의 것 즉, 소시민의 계몽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 역사의 변혁을 꿈틀대게 하는 수단적 방법은 영화의 쇼트를 통한 대중의 힘이 아니었을까라는 것이다. 언듯 예전에 수업을 들었던 게 생각이 난다. 난 '몽타쥬'이론이 예술적 접근만이 있는 줄 알았으나, '몽타쥬'란 시대적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영화가 대중에게 접근하는 한 방식으로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충격을 먹은 나는 에이젠슈테인에게 다시 감정이입을 시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하튼 개인적인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했지만 결국, 이 영화와 나의 글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은 영화가 우리게에주는 어떤 힘에 대한 질문이다. 두서에서 밝힌것과 같이 영화사에 있어 깊은 관찰은 다양한 방향성으로 갈라졌다.(두서에는 큰 그림으로 간단히 나눈 것이지만) '미쟝센 이론', '도그마95선언', '네오리얼리즘' 너무나 많은 사조들의 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어느 한 이론의 치중함이 아닌, 앞선 선배님들의 질문을 우리가 다시 받아 이어가야 하고, 그것이 영화 본질에 가까워지는 길이라면 '시네아스트들의 노력'은 2015년이 된 지금도 끝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에이젠슈테인을 부정 할 순 없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이론은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그의 이론은 어찌보면 영화의 사실성을 왜곡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절대 무시 할 수 없으며, 참고하고 가야하는 진보적 거름이다. 앞으로 굵직한 영화들에 대하여 글을 쓸 땐 이런 정신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2015년 대한민국 영화는 어떤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도 내 글을 통해 나왔으면 좋겠다.)

       앞선 선배님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 그리고 선배님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나의 생각을 다져간다는 것, 그것은 2015년을 지나 미래를 향해 영화가 본질에 더 가까워지려하는 시네아스트들의 끝없는 노력이며, 영화의 발전이라고 본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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