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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분석과 소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by 김영하 소설에 대해
    문화예술 감상기/Book Story 2017. 11. 5. 23:27

    - 정식분석과 소설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written by 김영하

     

    서론-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다 보면 계속해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건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책 내용에서도 그의 용어인 리비도(Libido)를 언급할 정도로 이 소설은 그의 이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 그럼 앞으로 이야기할 목록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다. 본론으로 넘어가 첫 번째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어느 부분이 구체적으로 프로이트의 잔상을 진하게 남기고 있는 지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작가는 왜 프로이트의 이론을 주춧돌 삼았는지도 추론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플롯(Plot)구조를 통해서 작가 본인이 어떤 자세로 글에 참여하고 있는지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진출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표지사진

     

    본론-

    1. 숨은 프로이트 찾기

       이 소설의 11p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그러나 나를 속일 수 없다. 난 그들이 의미 없이 내뱉는 말 속에서 가능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중략)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내면의 충동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의미 없는 말은 없다고 생각을 했다. 하나의 실언도 분석해 들어가면 심연 안에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이다. , 무의식이다. 주인공은 그런 프로이트적인 추적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뉘앙스의 문장이 초반부터 많이 보인다. 가령 12p '그림은 은연중에 그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준다.‘, 14p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이 주인공의 사고는 거의 프로이트와 같다고 본다. 약간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관심 가지는 것은 무의식의 영역 중 폭력성에 집중되어있다는 점이다. 폭력성은 죽음을 포함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영역을 두 가지로 보았다고 한다. 하나는 성적인 것. 다른 하나는 폭력성이다. 이 소설은 그 중 죽음에 큰 비중을 두어 서술해 간다. ’그런 아버지라면 죽여버리는 게 어떨까요? 적절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슬쩍 그런 말을 던져본다. (중략) 이 도발은 그저 내가 찾는 취향의 사람인가를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에 불과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이 소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영역을 노출했다. ’내가 찾는 취향이라는 말이 그걸 증명한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훑어보아도, 성에 대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비중을 크게 가지진 않는다. 오르가즘도 성적 쾌감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쾌감으로 전이되어 결국, 인간의 그 폭력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성적 쾌감보다 죽음에 대한 쾌감을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깝게 그리고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소설에서는 모두 죽는다. 성감대나 삽입에 대한 쾌감보다, 누군가의 죽음을 컨트롤하는 쾌감이 더 많이 서술된다. 그것이 유디트라는 그림을 통해 표현되었고, 나비를 죽이는 동생 K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나는 유디트, 미미 등을 통해 표현되었다.

     

       또 하나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여자주인공인 유디트가 북극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다. 유빙에 대한 부분인데, 물 위에 떠 있는 얼음덩어리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면 바로 프로이트가 빙산을 비유로 하여 의식구조를 설명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1 참조) 북극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C는 그 주위를 빙산이 돌고 있는 거라고 말을 하며, 유디트는 유빙 안에 얼어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이는 바로 프로이트의 빙산을 연상하게 만들고, 이 소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주춧돌로 삼았다는 걸 확신하게 만든다.

     

    그림1                           사진출처: wikimedia

     

                                           그림2                     사진출처: 내일투어 커뮤니티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디트가 남편을 잃은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을 다시 상기시켜보자. 유디트는 그녀가 물에 뛰어든 이유가 수십 년 전 잃어버린 남편이 유빙 안에서 늙지 않은 모습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 매우 비유적인 건데, 빙산은 우리의 의식구조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의식이고, 물과 부딪혀 출렁이는 부위가 전의식, 그리고 그 수면 아래로 무의식을 이야기하는데, 유빙의 모습을 보면 수면 밑이 보이게끔 생겼다.(그림2 참조) 마치, 무의식이 보이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저 물 밑의 얼음에 남편이 젊음을 유지하며 얼어있다는 것인데, 이는 무의식을 말하는 것이 된다. , 할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 것이다. 남편의 모습처럼 젊음에 대한 욕망이 무의식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향해 할머니는 뛰어든 것이 된다. 누군가는 이 대목이 남편이 그리워 뛰어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해도 틀리진 않지만 소설 본문에 작가가 이 에피소드를 비유로 인지하라는 말이 있고, 유디트의 말도 할머니가 그리워 뛰어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본문 58p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그때 대화에 필요한 예화들은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이하 생략)’ 이렇게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처럼 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허구로 구성한 하나의 예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유디트의 말을 보자. 같은 페이지에 ‘“남편은 이십대의 모습 그대로 얼어 있었거든요. 자신은 할머니가 되어 있고.”’ 유디트의 말을 보면 할머니가 남편이 그리워 뛰어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강조된 것은 자신은 할머니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일화는 할머니의 슬픈 인생극장이 아니라,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로 해석 될 수 있다. 이렇게 아주 치밀한 비유로 프로이트의 잔상을 남기고 있는 대목도 엿보인다.

     

    그림출처: 두루미

     

       또 어디에 프로이트가 숨어있을까? 바로 C의 꿈이다. 일단 꿈을 그렸다는 것 자체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고, 더욱이 꿈의 내용이 프로이트의 향기를 더 진하게 풍긴다. 본문 49p '무수한 꿈을 꾸었다. 기억나는 것은 마지막 꿈 하나, 하얀 설원에 북극이라는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다. (중략) 다가가서 곰의 시체를 뒤집자 곰은 어느새 K로 변해있다. (중략) 발가벗은 유디트는 긴 칼로 C의 눈을 찌르려 한다. 어느새 그녀의 칼이 그의 눈을 뚫고 뒤통수로 나오는 게 보인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분석들이 보인다. 첫 번째로 주목할 부분이 곰과 K가 하나로 된 것이다. 이건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 동생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합당치 않은 것이다. 그걸 우리의 슈퍼에고(원초적 도덕)는 알고 있다. 하지만, 죽이고 싶은 무의식적인 소원은 있다. 이 둘이 충돌을 일으킨다. 꿈의 해석의 한 부분을 발췌해 보충 설명을 하면, ’-주제나 주제에서 비롯되는 소원을 혐오하고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꿈들이 왜곡되고 소원 성취가 알아볼 수 없게 위장된다고 충분히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꿈-왜곡은 검열 행위로 증명된다. (중략) <꿈은(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 그래서 C는 동생 K를 북극곰으로 바꾼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조금은 마음이 안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꿈의 요지는 CK를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이 근본이다. 단지 K으로 전치시켰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C의 꿈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왜곡에 대입하여 서술하고 있다. K의 얼굴을 보이게 한 건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그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법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게 아닐까 한다. 실제 C와 같은 환자의 꿈이었다면, 그냥 북극곰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소원성취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왜곡은 위 발췌 글에서도 나온 것처럼 소원을 가리는 것이다.‘ 그것이 외양적으로 드러나면 불편하기 때문에 혐오감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쓰인다. 왜곡이 있어 꿈이 난해해도 결론적으로 C는 속으로 소원을 이룬 것이 된다. 북극곰을 총으로 쏜 것은, 동생 K를 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CK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문단에서 더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일단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소설의 이 내용은 프로이트의 -왜곡을 인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어서 두 번째로 주목해 볼 부분이 꿈속에서 유디트가 C의 눈을 찌르는 것이다. 이는 오이디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조금 다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 스스로 눈을 찔렀다. 조금 다르게 변형이 되긴 했지만, 작가가 구지 많은 부위 중 눈을 선택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누가 칼을 들고 눈을 찌르는가? 보편적으로 눈을 생각하지 않는다. 찌르기 쉬운 복부나 팔 등을 먼저 찌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C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야기한 프로이트를 연상하게끔 만든다. 작가는 그걸 노리고 C의 눈을 파고든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쩌면 CK를 죽이고 싶어 하는 소원과도 하나가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사랑에 대한 독차지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고자 아버지와 적대적 관계에 놓이지만, 모든 면에서 아버지보다 나약해 거세공포증을 느낀다. 남근기라든지, 동일성 등 부차적인 설명에 앞서서 전재하는 것은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본능, 그 욕구이다. 그런 부분이 CK의 형제 관계에서도 형성이 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부자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형제의 관계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소설은 서술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사랑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은 전자나 후자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프로이트가 형제나 자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음 문단에서 직접 쓴 텍스트를 토대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고자 한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알버트 그라이너, 1896년

     

       C의 꿈 내용에 이어서 CK의 관계에 관해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나는 프로이트의 저서 꿈의 해석의 한 부분을 먼저 소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먼저 어린이들의 형제자매에 대한 관계에 주목해 보자. 나는 왜 다들 그것이 사랑에 넘치는 관계라고 가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린이는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어린이는 자신의 욕구를 격렬하게 느끼며, 특히 경쟁자인 다른 아이들, 일차적으로 형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그것을 충족시키려 든다.’, ‘그러므로 현재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이 죽으면 몹시 상심할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무의식 속에서는 그들에 대한 나쁜 소원을 품고 있으며, 이 소원이 꿈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충격적이겠지만, 프로이트는 어릴 적 아이들에게 형제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에게 다른 누군가의 등장은 사랑을 빼앗아갈 적이다. 그렇다면 소설로 돌아와 보자. CK의 관계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표현과 딱 들어맞는다. KC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C가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본문 42p ‘형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기억들은 탈취의 기억들이다.’ KC가 자기에게서 탈취해간 것들의 트라우마가 있다. 심지어 C가 아끼는 나비를 태우며 오르가즘에 가까운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아동기의 소원이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CK나 서로 적으로 대하던 아동기의 소원이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다. KC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과 위에서 언급한 C의 꿈을 통해 드러난다.

     

    사진출처: 「꿈의 해석」, 열린책들, 표지사진

     

     

     

     

    2. 무의식을 알아가려는 것

       위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어떻게 프로이트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이 소설은 성실하게 프로이트의 뒤를 쫓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프로이트를 쫓는 것일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갈 수 있다. 그건 바로 진짜를 찾아가고 싶은 작가의 소원일 것이다. 그것이 예술과 삶과 하나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미미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그녀를 만나면서 C는 행위예술과 영상작업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이게 된다. 행위예술은 진짜가 된다. 이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닌 무의식에 가까운 작업이다. 미미는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을 걸쳐서 검열된 것이 어떻게 순수하게 일 수 있을까? (이건 묘하게 C의 꿈-왜곡, 북극곰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진정한 예술이 아니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인 나를 만나는 과정이고, 그 과정은 검열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건 순간의 행위이다. 그것이 무언가를 통해 녹화되면 그건 변형이 일어나고 거짓이 된다. 그녀는 그렇게 영상예술을 혐오한다. 영상은 어쨌든 감독에 의해 한번 걸러지기 때문이다.

       C는 이에 반격한다. 영상매체도 그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의 반격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은 소설의 끝에서 엿보인다. 그건 미미가 렌즈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대목이다. 미미는 그것을 보고 괴로워한다. 이 이야기의 구조가 재미있는 것이 무의식의 참된 나를 추구하던 미미가 3인칭으로 자신을 목격하자 그 참된 자신이 낯설어 보이고, 혐오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자신이 1인칭으로 행위예술을 할 때 자신의 무의식을 마주할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잔인하게도 모든 민낯을 녹화할 수 있고, 그것을 반복해서 재생할 수 있다. 미미는 3인칭으로 자신을 보는 최초의 순간을 C를 통해 겪는다. 그리고 그걸 마주할 수 있다. C의 말이 일리가 있게 되는 부분이다.

       행위예술도 그만한 가치가 있고, 영상예술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행위예술은 행위를 참된 나에게 맡긴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영상은 그 참된 나를 바라보고 인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작가는 우리에게 무의식이란 달콤한 끝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위에서 프로이트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무의식에 존재하는 걸 부정하려 한다. 그것이 꿈에서 왜곡을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인 우리의 사고에서 매우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겨운 것을 미미는 행위를 통해 표현했지만, 자신이 마주하진 않았다. 영상매체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미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것 같다. 반면 C는 미미의 행위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무의식이 미미라는 대상을 통해 표출되는 쾌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반복적으로 미미의 영상을 본다. 이 부분도 프로이트가 서술한 동일시를 연상하게 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다 보면 가끔 이런 흐름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쌓은 경험과 학식으로 환자의 꿈을 해석해서 들어간다. ‘-왜곡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할 때는 C의 꿈처럼 다소 충격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통 환자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환자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생각을 한다. (간혹 이런 모습이 엘리트주의 적이고 때론 권위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납득이 가기 때문에 독자인 나에게 크게 거부감은 없었다.) 이런 부분들이 그의 저서에 매우 많다. 형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프로이트는 반대론을 예상하고 글을 쓴다. 꿈의 해석의 한 부분을 발췌해서 보면 사랑하는 친척의 죽음 앞에서 비통한 감정을 느끼는 꿈들은 다르다. 이것들은 내용이 말하는 것, 즉 관계된 사람이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의미한다.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는 사람과 독자들이 내 해석에 반발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상세하게 증명해야 한다.’, ‘누군가 몹시 비통해하며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자매가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 꿈을 그가 <지금> 그들의 죽음을 바란다는 증거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반박에 대한 대비를 한 것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본인의 이야기를 오해하거나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바라고 있다.

       위에서 미미의 상황도 어쩌면 이런 상황일 수 있다. 자신의 것을 마주한다는 것. 물론, 프로이트가 만난 환자들은 본인을 3인칭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에게 반박을 가한다. 하지만, 미미의 경우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 3인칭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무의식에 반박을 못 한다. 어쩌면 이런 미미의 모습도 검열을 거치지 않은 포인트일 수도 있겠다. 녹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감독이 편집을 가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영상은 본인 자신을 그대로 녹화할 뿐이다. 그 앞에서 미미는 어떤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자신을 그대로 화면을 통해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어쩌면 그 모습에 우리를 대입해 보자. 우리는 어떨까?

     

    사진출처: 다음영화

    영화화 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포스터, 2003년作, 전수일 감독

     

       작가의 관점에서 의식을 걸쳐간다는 것은 거짓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야기의 작은 부분들에서 소설에 대한 회의감도 엿보이는 것은 잘 짜여진 치밀한 소설들에 대한 회의감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껍데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검열을 걸친 것이 진짜를 이야기하고 있는 꼴이니, 작가의 입장에서는 아귀가 안 맞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짜여지지 않은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클림트가 표현한 [유디트]나 들라크루아가 표현한 [사르다나팔의 죽음]에 대해 진짜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토로한다. 본문 132p ‘같은 소재를 삼류 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사르다나팔이 자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알고 있었으리라. 죽음을 주재하는 자의 내면에 대해서 말이다.’ 이렇게 작가는 들라크루아의 표현방식에서 인간의 폭력적인(혹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알고 있었으리라. 죽음을 주재하는 자의 내면에 대해서이 부분이 인간의 진짜를 찾은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컨트롤하고 싶은 인간. 도덕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그 짜릿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들라크루아는 사르다나팔의 모습처럼 죽음을 관조한다. 그리고 그 폭력적인 부분에 밝기를 높여 자신이 보고 싶은 걸 조명한다. 겉으로는 싫어하지만, 사실 폭력적인 걸 보고 싶은 사람의 욕구. 작가는 그것에 대해 끊임없는 탐구를 이어간다.

     

       작가는 마지막에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이라고 한숨을 쉬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다른 점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말이 숨겨진 것인데, 그건 바로 우리의 무의식이 수면 밑에서 아주 큰 뿌리를 트고 있기 때문에 삶이 쉽게 변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무의식이 지배하는 우리. 과연 그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마지막의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어찌 되었던,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확실한 결말을 내지는 못한 것 같다. 위 문단을 보면 약간 희망적이기도 한 것 같고, 마지막 문장을 보면 무기력의 끝을 달리는 것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인간 내면의 진짜는 그것이라는 걸 토해내는 듯한 느낌의 글이다. 그 후에 독자에게 많은 짐이 던져지는 감이 있다.

     

    사진출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삽화발췌

     

       이 파트를 마무리 해야겠다. 작가는 무의식의 탐구를 이어나갔다. 그건 수없이 많은 여행을 다니지만, 바뀌지 않은 인생에 대한 조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의 기원은 바로 빙산 밑에 있었다. 북극점 근처를 빙산이 돌고 돌지만, 우리의 빙산은 변하지 않는다. 그 수면 아래에는 나의 진짜가 있다. 작가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쉬는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 매우 부정적이지도 않다. 그런 나를 알아야하는 건 중요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과 마주할 것을 이야기한다. 본문 134p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우리에게 자살이 답이라고 말하는 그런 식의 삼류 소설이 아니다. 작가는 그걸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주조하고 싶지도 않다. 작가는 인간은 이런 존재일 거라는 하나의 비유를 독자에게 선사했고, 독자들에게 삶 속에서 고통스럽고 무료해도 스스로 그대들의 갈 길을 가라고 말한다. 이렇게 소설은 다시 독자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넘기며 소설을 마무리한다.

     

      사진출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삽화발췌

     

     

     

     

    3. 작가가 글을 쓰는 자세에 대해

       이 소설의 내용을 떠나 형식적인 측면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분석이 될 것이다.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그의 소설은 비선형적인 구조를 가진다. 기존 소설의 기승전결의 구조를 섞어놓은 기분이다. 시점도 뒤죽박죽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흐름을 쭉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생각나는 포인트로 뛰어넘어가기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이 소설의 시점을 정리해 보면 첫 번째는 작가이자 상담가 같은 어느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C의 입장에서 써지는 이야기. 그리고 K의 입장에서 써지는 이야기. 이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쪼개지는 것은 작가 같은 남자의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가고 있으며, CK의 상황도 그들의 의식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고 있다. 마치 자유연상의 방식으로 말이다.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정신 분석과 정신 분석적 심리 치료에서 행해지는 기본적인 절차’(다음 백과사전 발췌)라고 되어 있다. 프로이트도 치료과정에서 이 자유연상을 이용했다. 그렇다면 작가의 서술방식은 이런 정신분석학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 이 소설은 내용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작가 본인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 조차도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된다. 이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독자들에게 작가로서의 개입. 검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쓰기 방식. 그런 날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자세일 것이다. 자신의 잘 짜여진 컨트롤을 통해 가짜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흐름은 캐릭터 각자의 의식의 흐름대로 흐른다. 감정의 조작이 아니라, 감정의 나열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재미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그건 위에서 정리한 상황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한번 다시 살펴보자. 소설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 3가지 덩어리의 공통점은 남자라는 것이다. 작가 같은 남자 그리고 CK는 작가 본인의 분신이다. 마치 삼위일체를 연상시키듯, 이 셋은 작가 김영하의 분신들이다. 잘 생각해 보자. 이 소설에서 유디트나, 미미의 관점으로 서술된 부분이 있는가? 없다. 남자인 화자가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을 그렸다. 그것은 이 세 가지 상황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결국 작가 본인의 페르소나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자유연상은 더욱더 깊은 의미르 가진다. 캐릭터들이 소설 속에서 물리적으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소설의 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작가 본인의 분신이라는 하나의 존재로 통일이 된다면, 이 소설의 캐릭터들이 각자 떨어져 있음에도 의식의 흐름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 소설을 쓴 김영하 본인의 무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작가의 의식적 흐름이 캐릭터들을 물리적으로 떨어트려 놓아도 하나로 통일시킨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 속에서 캐릭터들을 쪼개어 놓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김영하 작가 본인의 자유연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본인의 행위조차도 내용과 일치시킨다. 글을 쓰는 행위도 작품의 하나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글쓰기 방식이 독자들을 난해함 속으로 빠트리는 단점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적인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작가의 가치를 얻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삽화발췌

     

     

     

     

    마무리-

       약 3가지 단계를 걸쳐 이 소설을 요목조목 따져보았다. 한 가지 우려의 점은 정신분석학적 지식이 없다면 이 소설은 접근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또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이 소설을 통해 정신분석적 접근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얻고, 우리 스스로 삶을 탐구하는 열정의 불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어찌 되었든 이 소설을 있는 현상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현실감각이 없다. 어떤 큰 비유로서 이 소설을 바라본다면 분명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비록 너무 난해하고 어렵다는 점이 다가가기 힘들게 만드는 단점을 품고 있지만 말이다.

     

     

     

    p.s. - 논외의 주제라 추신을 남긴다. 이건 나의 개인적 의견인데, 현시대를 생각해 봄에 이 소설은 여성에 대한 시선에 있어 불편한 것이 몇 있다. 작가의 성별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것도 같지만, 소설 속에 보여지는 미술작품들의 이미지나 그것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나에게 너무 남성적 시선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대작을 그린 화가들은 모두 남성이지 않는가?) 또한 이 소설의 화자들도 남성으로 구성되어 여성이 객체가 되는 감이 있다. 물론, 여성의 입장을 다 대변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욕망이 남성중심적으로 해석되어 풀어지지 않나하는 작은 의구심이 든다. 성에 대해 직접적인 차별을 둔 것은 아니지만, 은근한 냄새가 풍긴다. 어쩌면 이는 남자작가로서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성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궁금해진다.

     

     

    Written by 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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