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옥수수와 나』에 대하여 '이는 기만적인 글이 되는 것인가?
    문화예술 감상기/Book Story 2017. 9. 30. 13:52

    옥수수와

    written by 김영하

       

     

    이는 기만적인 글이 되는 것인가?: 지젝의 농담에 대해-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동유럽 농담을 한번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환자는 본인이 스스로 옥수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이 자신을 옥수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 혼자 무언가를 깨달고, 진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건 나 스스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더라도 위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성공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념을 작가는 그대로 소설에 접목시켰다. 작가 박만수와 사장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소설의 후반부에서 작가 김영하는 소설이 문학적으로 인정받는 부분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자신은 뮤즈를 만나 최고의 작품을 써내려갔다고 자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매우 부족하다. 정작 문학을 받아들이는 타자가 그것을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면 그건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사장은 권력이 있다. 권력이 있는 타자가 그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가 이 작품을 어떻게 요리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격은 달라진다. 재미있는 대목이 사장이 작품을 유작으로 해서 광고를 한다면 매스컴을 탈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권력을 가진 타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격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장 본인은 쓰레기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상품가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문학을 정식 승인된 절차를 통해 받아들였다. 출판사가 있고, 문학계가 존재하며, 그들이 수여하는 수상도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책이라는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인쇄가 되어 지고 지금 우리 책상 위에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책을 받아들이는 혹은 고르는 대중은 생각보다 승인절차에 수긍을 잘 한다. 일반적으로 책을 선택하는 기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판매된 숫자, 수상여부, 작가 혹은 출판사. 그리고 우리는 책의 형태로 글이 나와야 작가로 인정해 준다. 단순히 공책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 글을 쓴다고 다 작가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이 내가 지금 읽은 이 이상 문학상 작품집으로 비유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 문학상그것은 작가에게 과 같은 존재이다. 소설 후반부의 뉘앙스를 미루어 보아 한 작가가 이런 에게 대항하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건 이런 옥수수와 닭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작가 김영하는 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대결구도는 지젝의 본뜻과는 조금 거리가 먼 맥락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 작품은 스스로 기만적인 글이 된다. 하지만, 후반부를 조금 다르게 조합을 해보면 이 작품은 작가와 출판사(혹은 권력자)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질문을 희미하게나마 내포하고 있다는 걸 발견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무조건 기만적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옥수수 낟알로 비유되는 작가의 존재에 대한 질문, 그러니까 대타자를 두고 그 안에서 꼼짝 못하는 작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닭에 대한 분노 보다 옥수수 낟알이 되어 진 작가 스스로를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다른 맥락이다. 그것을 암시하는 단서들이 보이기 때문에 지젝에게서 멀어지지도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지도 않는 듯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그리고 독자가 억지로 맞추어야 한다는 점도 무언가 이상하다. 그러다보니 지젝의 인용에 더 가까운 포인트가 숨겨져 있거나, 버려져 있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작품을 해체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소설이 결론적으로 어떤 맥락으로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점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강하게 줄지 알게 될 것 같다. 다음 장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저자의 죽음: 작가의 오류에 대해-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이 난해한 소설을 작가의 숨은 그림 찾기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첫 인상에 대해 분석함에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작가의 의도나, 지젝의 인용구를 앞세워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역순으로 소설을 파악해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정리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해설을 듣고 이해하다기 보다는 김영하 작가가 표현한 필체들을 각자 개인적인 콘텍스트 안에서 스스로 다시 해석해보는 것이다. 다시 논리를 따져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위에서 내가 던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들어날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분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도 파악될 듯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는 긴박한 상황과 박만수의 속도감 있는 독백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박만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게끔 만든다. 애초에 글의 시점 자체가 박만수라는 작가의 일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박만수를 객관화시켜 보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작가와 닭의 싸움으로 보인다. 다시 넓은 범주로 끌고 가면 작가의 불우한 현실이거나, ‘예술은 쥐똥도 모르고 돈만 밝히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작가 박만수의 뮤즈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 된다. 그는 전 부인이 다른 남자와 자는 것에 혐오를 느끼면서 정작 본인은 남의 부인과 섹스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매우 격한 필체로 남겨지고, 주인공의 주체적인 글을 쓰는 과정의 한 부분으로 묘사가 되기 때문에 그의 모순적 행동을 독자는 쉽게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이 부분은 앞에서 철학자 친구와 나눈 대화와 충돌을 일으킨다. 철학자 친구의 비밀스러운 성생활이 작가 박만수에게는 탐탁지 않다. “이래서 철학이 외면을 당하는 거야, 이 사람아.”라고 속으로 말하는 걸 보면 박만수는 철학친구가 유식한 척 하면서 합리화를 심하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철학친구에게 가르치듯 소설가는 말이야. 현실적이어야 해.”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그런데 소설의 후반으로 가보자. 그는 어떤 환상에 빠져 글을 써나간다. 평소에 잘 써지지도 않은 글이 육체적 만족감을 얻은 후 아주 빠르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써진다. 그는 스티븐 킹, 오노레 드 발자크를 들먹이며 작가를 두 종류로 분류하고, ‘본인을 영적인 엑스터시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쓰는 작가로 둔갑시킨다. 사실 이 대목은 앞부분에서 현실적이어야 해.’라고 말한 사람과는 뭔가 어긋나는 느낌을 준다. 그의 모습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이 사실 그렇게 아이러니를 주지 못한다는 점이 오류이다. 이런 박만수의 모순을 잡아내려면 김영하 작가가 쓴 필체를 벗어나야지 인지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 대목을 다루고 있는 책의 51p52p는 예술적 영감에 심취한 박만수의 감정에 너무 이입하게 만드는 필체이다. 그래서 독자는 예술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마치 황홀경에 빠진다는 느낌이랄까? 어떤 아우라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예술이라는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미지의 세계가 이해할 수 없지만 무언가 있는 듯한 아우라로 남겨져야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그래서 더욱더 박만수는 독자에게 사랑받는 낟알이 된다.

       이 책을 읽는 첫 순간은 분명 천재 작가 박만수의 불행한 상황으로 전체적인 그림이 잡힐 것이다. 필체와 흐름이 분명 그렇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박만수는 매우 이질적인 캐릭터이다. 의심이 많고, 본인도 섹스를 즐겼으며, 황홀경에 빠져 글을 써나갔다. 그 글이 어떻게 쓰였고, 어떤 예술성을 포함하는지는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그가 쓴 글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박만수가 쓴 소설을 우리가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어떤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박만수의 시점으로 써져가는 필체가 그를 무언가 위대한 예술작가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왜 지젝의 농담과 어긋나는 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옥수수와 닭을 언급한 맥락을 조금 더 살펴보면 지젝이 낟알을 불우하게 그리려고 그런 비유를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 ‘을 비판하기 위해 이 비유를 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박만수가 불행하게 그려지는 것은 사실 이 농담과 그리 상관이 없다. 지젝은 상징적 효력을 설명하기 위해 옥수수와 닭의 비유를 든다. ‘상징적 효력이란, 어떤 사실이 진실이 되려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사실이 대타자에게도 알려졌음을 알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토니 마이어스作 발췌) 상징적 효력이 나온 배경은 지젝이 인간은 자유를 가져도 스스로 피지배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아이러니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지젝에 대한 저서인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 토니 마이어스는 지젝이 말한 부분이 타자의 귀환’, ‘규제에 대한 욕망’, ‘탈근대성의 역설이라고 했다.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해보면 탈근대성의 역설은, 대타자의 붕괴로 생겨난 자유가 실제로는 어떤 부정으로 다가와 규제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습관에 대한 헤겔의 논의와 유사하다. 헤겔에게 습관은 세계에 대한 기계적 반응의 하나로, 이 반응은 세부에 대한 관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더 심오한 문제에 참여하게 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맥락을 살펴보면 지젝은 결코 낟알을 보호하기 위해 쓴 내용이 아니다. 낟알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어떻게 탈근대성을 이룰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옥수수와 나라는 단편에서 작가 박만수는 위대한 작가의 아우라 보다는 피지배적인 경향을 보여야 말이 된다.

       첫 소제목에서 내가 언급한 몇 단서들이 이 소설을 기만적이라고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사실 김영하 작가의 필체를 벗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두고 본다면 박만수는 피지배적 성향을 보이는 대목이 있다. 그 단서가 희미할 뿐이다. 다시 스토리를 생각해보자. 박만수는 스스로 예술적 자유를 만끽한 것 같지만, 스스로 모더니즘적 태도를 취한다. ‘어떻게 다작을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스티븐 킹이 그랬다지.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다른 작가들은 매일 글을 쓰지 않으면 그 시간에 도대체 뭘 한답니까?“ , 그는 이미 이 지경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 역시 그분의 뒤를 따라 오랜 슬럼프를 뚫고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선 것이다.’ 본문 51p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후 박만수는 작가를 두 분류로 나누어 정의한다. 이 대목을 해체해 보자. 박만수는 이미 대타자가 존재한다. 출판사 사장이 아닌, 바로 동경의 대상들이다. 그가 존경했던 작가들의 뒤를 따른다는,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피지배성이 보인다. 구지 부류를 나눌 필요도, 다른 작가의 말과 삶을 인용 안 해도 된다. 그런데 그는 그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스스로 자유인이라면 그들과의 비교는 필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 스스로 예술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면, 우리는 왜 비교를 하는 것인가? 또 질문을 해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다양성이라고 말하면서 왜 기준점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박만수의 기준이 보여 진다. 그가 기준을 두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기준이 있다. 그것이 뒤에 숨겨졌을 뿐이다. 그는 희미하게 자신의 소원성취를 비춘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이미 예전에 존재한 것 들이다. 그는 그것의 뒤를 따름에 좋아할 뿐이다. 예술가는 이럴 것이라는 그 이미지. 그 기준이 이미 존재한다. 이런 단서가 지젝의 인용이 크게 엇나가지 않는 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 좀 더 생각해 파편들을 껴 맞춰 보면 박만수도 지젝이 표현한 낟알과 같은 맥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종적으로 그것이 확연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지로 맞추어야 무언가 아귀가 맞는 느낌이다. 그리고 작가의 표현력 자체가 이 부분에 힘을 주지 않기 때문에 마치 본인이 놓쳤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글을 분석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두 가지의 유추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건 김영하 작가 본인이 지젝의 농담을 이해했음에도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필체나 사건에 집중해 의도치 않게 흐름을 벗어났다던가. 아니면 애초에 맥락을 파악 못하고 써내려갔다는 건가. 이 둘의 추측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작가의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표현력 면에서 그것이 가려진다면, 그리고 결론적으로 독자가 엇나가게 받아들인다면 그건 독자의 낮은 이해력이 아닌 작가의 오류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본인의 뜻이 그게 아니라고 하여도, 소설이 포커스를 두는 무게감에 대한 책임은 분명 작가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의 의도를 직접 듣는 것만으로 이 작품의 정리는 힘들다. 다시 역으로 작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무리-

       <옥수수와 나>에 대해 마냥 좋게만 비평하진 않은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집요하게 파고든 이유는 철학자 지젝의 말을 인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다는 것은 그것의 맥락을 파악한 후 사용해야한다. 자칫 지젝의 본뜻을 독자들이 오인하여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오류가 다분히 많다고 생각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이 책의 스토리를 통해 지젝의 본뜻을 이해할 것인가? 나는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박만수의 시점에 너무 이입한 김영하 작가의 표현력은 결국 그 본뜻을 가려버린다. 혹자는 이 책은 지젝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지젝을 반박하기 위함이다.’라고 반론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것이 주인공 박만수의 모습은 예술을 한다는 사람의 자유혹은 예술의 경지로 국한 되어 있다. 예술의 황홀한 경지가 보이기 때문에 상징적 효력에 대한 반박성으로 보이진 않는다. 예술의 황홀경이 상징적 효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예술인은 대타자에게 쉽게 휘둘리기 때문에 불행한 존재라는 것이 그것에 대한 반박인가? 오히려 이 부분은 반박이라기 보단 지젝의 말을 인용해 작가 본인의 자의적 해석을 가한 느낌이다. 작가는 대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옥수수 낟알과 닭의 관계성을 인정하고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성을 그리지 않았는가. 이렇게 논리가 이어지면 김영하 작가는 지젝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이 된다. 지젝은 상징적 효력에 대해 탈근대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김영하는 낟알이 된 작가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옥수수와 나는 지젝의 본 뜻과는 별개로 그의 농담을 인용을 해 작가 본인의 자의적 해석을 가한 것으로 결론이 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건 나의 추측이다.

       위와 같이 작가가 자의적 해석을 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젝의 본뜻을 전달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텍스트에서 던져지는 뉘앙스는 우리를 지젝에게 인도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옥수수와 나>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던, 이 소설이 독자에게 끼칠 영향력은 무분별한 섹스와 뮤즈를 둔갑시키고, 예술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쓸데없이 설파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술인은 비합리적이게 뮤즈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짐승과 같아진다. 박만수 개인의 생각이 우리에게 드리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리고 남성적 시선의 뮤즈가 우리에게 고정관념의 이미지를 씌우는 것은 아닌지도 심히 걱정된다.

       스티븐 킹이 다른 작가들은 매일 글을 쓰지 않으면 그 시간에 도대체 뭘 한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질문에 작가 박만수는 섹스를 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장소: 건강한다방 올가숲 카페

    사진출처: 다음 책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