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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문화예술 감상기/Movie Talk 2015. 10. 8. 15:50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Vous n'avez encore rien vu
Film by Alain Resnais
서론
이 영화가 지금 내가 쓰는 이 몇 장의 글로 정리가 되어 질수 있을지가 의문이 든다. 그만큼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점들이 너무나 많고, 그만큼 나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만 정리되어지는 것이 무리일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정말 중요한 포인트는 영화가 구경거리로서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관객스스로 분석하고 정의 내려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완성’임을 밝힌다. 그리하여 이 글 몇 장으로 영화를 완벽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래부터 시작되는 글은 나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만 국한되어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서론에서 일단 짚고넘어가야할 점은 영화가 관객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이 함께했을 때 완성이 된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본다면 이런 것이다. 영화가 알랭 르네의 손에 의해 물리적인 완성이 되어졌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 생각해보면 영화분야의 물리적 완성은 역설적이게도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찰나의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영화를 보고 그것을 ‘나의 것(손으로 가지는 소유)’이라는 개념보다는 ‘누군가의 것을 엿보았다’라는 개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생각해보면 그것은 재미있는 구경거리 또는 누군가와 함께한 추억일 뿐이지 그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나의 소유로서 생각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물론, 영화는 누군가와 함께한 소중한 추억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찰나의 현상으로 남는 영화가 개개인의 가슴속에 영혼처럼 영원히 남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로 남을 수 있는 작품이 몇몇 있다고 필자는 본다. 그런 작품은 ‘엿보다’보다는 ‘나의 삶’이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또는 ‘나의 거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가야하는’ 영화는 관객들의 사고가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그만큼 생각할게 많아 싫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은 결국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더 크게는 작품의 구체적인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알랭 르네는 물리적인 완성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아마 ‘어떻게 관객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을까?’라는 사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함께 완성해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를 아무리 이성적으로 파고들어본다고 한들 이 영화의 애매성은 구체적인 답안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답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존재에 대한 지각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아직 그 지각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본론
영화와 ‘나’의 벽을 허물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영화이 구성이다. 다르지만 똑같은 스토리를 이끌고, 한 배역의 캐스팅을 이중으로 하는 저 독특한 구조. 알랭 르네는 왜 저렇게 구성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저건 위험천만한 모험일 수 있다. 한 캐릭터를 한 배우가 일관성 있게 이끌어가지 않고, 두 배우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것은 스토리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다. 한 캐릭터 즉, 한 사람의 얼굴에 집중하여야 감정이입도 더 잘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스토리의 감정이입과 기승전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는 이 감독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라도 당신의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영화 구조이며, 그것을 통한 영화와 ‘나(관객)’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하나의 역할을 각각 다른 사람들이 연기한다. 같은 캐릭터지만 서로 연기하는 스타일에 따라 그 캐릭터가 형성되어지는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사빈느 아제마가 에우리디스를 연기하는 것은 부드럽고 연약한 면이 있는 반면에, 안느 콩시니가 에우리디스를 연기하는 것은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은 약한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취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르페우스를 연기하는 랑베르 윌슨 그리고 삐에르 아르디티도 매우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금 다른 거 같지만 비슷하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비슷하다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저 상황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저 흐름은 현대에 대입하여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시대적 비극에 두려워하고 있다. 남자는 그녀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지만 모락모락 올라오는 의심은 그를 점점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제 3자의 목소리들! 결국, 그것은 남자의 의심만 더 커지게 한다. 그렇게 커져가는 의심은 그녀를 그리고 남자를 파멸로 이끈다.’ 마지막은 조금 비현실적이게 극단의 비극으로 가지만, 관심이가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저 자연스러운 상황은 누구나 다 공감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에 있어서는 크게 부자연스러운 것이 없다.
그렇다면 좀 더 넓게 생각해보자. 결국, 두 배우들이 한 배역을 연기하는 것을 나누어 보여주는 쇼트들은 어떤 배우건, 어떤 사람이건 이 상황에 모든 관객을 적용시키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 배역을 각자 돌아가며 보여주지만(약간의 스타일 차이는 있지만) 실상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저런 상황 속에 내가 들어간다고 한들 달라질게 있겠는가? 여러 명의 얼굴을 교차로 같은 캐릭터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스타일이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이 영화 속 캐릭터와 이야기의 흐름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랑베르 윌슨이던 삐에르 아르디티던 역에서 혼자 에우리디스를 기다리는 모습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 초조한 마음은 똑같지 않은가? 그 상황에서 나라고 다르게 마음을 가지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군가는 다리를 꼬고 기다릴 것이고, 누군가는 테이크아웃 커피용기의 입구를 입으로 물어뜯으면서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그녀를 기다리는 그 초조한 마음은 너나 나나 똑같을 것이다. 행동이 달라도 오르페우스는 오르페우스인 것이다. 사람은 각자 개성이 너무 뚜렷하다. 나는 와인을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펴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나와 다르게 와인 잔의 목을 꽉 쥐는 버릇이 있을 수 있다. 이뿐이겠는가? 같은 유형의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한들 위에서 보여 지는 인간의 굴레에서 우리는 독특할 수 있는가? 왼손잡이건, 오른손잡이건 매력적인 여자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저런 마음을 가질 것이고, 의심은 똑같이 피어날 것이다. 보수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그를 벗어나고 싶은 자유는 ‘나(Me)’던 ‘당신(You)’이던 또는 ‘그(He)’이던 ‘그녀(Her)’이던 똑같을 것이다.
이런 영화적 구조를 통해 저 배우들이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건 껍데기는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영화와 ‘나’사이의 벽을 허무는 구조라고 생각되어진다. 영화가 구경거리로서만 찰나의 간접경험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 상황 속에 존재 할 수 있다는 남의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것이다. 이런 영화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하여 느끼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 캐릭터 ‘죽음’
이야기가 끝으로 가면서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면서 영화 속 희곡이 재현되는 포인트도 유명한 극작가 앙뜨완의 죽음에서부터이다. 그만큼 이 작품 밑바닥에 알게 모르게 깔려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 작품은 인간의 다른 점과 어떤 유사성 즉, 인간세계가 가지는 어떤 알레고리를 제시하면서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여행의 끝인 ‘죽음’에 대한 고뇌를 우리에게 던진다.
배우들이 희곡을 재현할 때 무슈 앙리는 캐스팅이 바뀌지 않는다. 주요한 배우들은 더블캐스팅이 되어있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슈 앙리만은 더블캐스팅이 아니다.(물론, 다른 배역도 더블캐스팅이 아닌 경우가 있다. 하지만 무슈 앙리라는 캐릭터만큼 희곡에 큰 비중이 있지 않다.) 무슈 앙리는 죽음과 현실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 그만큼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런데 감독은 무슈 앙리 만큼은 마티유 아말릭이 끝까지 연기하도록 한다. 그리고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연기하는 두 배우들을 넘나들며 그들을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는 마치 두 개의 방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인데, 그건 또 다르게 생각하면 다른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계속 끝없이 나타나는 일괄된 존재인 것이다. 감독은 이런 무슈 앙리를 통해 ‘죽음’은 시대의 발전, 공간의 다름, 타인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일괄되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무슈 앙리의 존재처럼 ‘죽음’은 다른 배역이 같은 상황을 연기하더라도 일괄되게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환생하여 다른 삶을 산다하여도 우리에게 ‘죽음’은 주어진다. 그것이 두 배우들을 넘나드는 무슈 앙리의 모습을 통해 느껴지게 된다. 생각해보면 무슈 앙리가 불변의 진실일 수 있다.
알랭 르네는 ‘죽음’에 대한 지각을 해야 함을 콕 짚어주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굉장히 오묘하게 끝이 난다. 주인공들은 초현실주의적으로 죽음의 공간에 들어오게 되고, 앙뜨완의 죽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게 영화는 끝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 스토리인 왕뜨완이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퀀스에서 우리가 보아야할 점은 앙뜨완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반전이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냐는 점일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 사람의 잔상은 남아있지 않을까?
영화는 ‘죽음’으로가는 우리의 삶에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듯하다. 스토리 안에는 ‘사랑’과 ‘인간관계’라는 굵은 대목이 있지만, 그 추상적 단어들을 하나하나 파헤쳐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리라. 영화는 우리에게 초대장을 내민 것일 수 있다. 이 진실한 세계로 들어와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불변의 진리 위에 인간의 굴레가 흘러가고 있다. 그 굴레 안에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못 보았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영화와 당신이 함께 걸어가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 무엇인가를 조금은 보았을 수도 있다.
마무리
더 보아야 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사유들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 질문일 것이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꼭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구경거리가 될 수 없다. '나의 것'이 되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고, 내가 함께 고민해 나가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부분은 이런 점들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관객과 떨어져서 완성될 수 없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진실을 외면하고 살았던 우리에게 이 제목은 하나의 대사와 같다. 그리고 진실한 조언이 되기도 하다. 우린 현실과 마주하지 않고 회피만 한 것이 아닐까? 진실은 사실 영화의 포스터처럼 저 얇은 커튼 뒤에 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마주한 커튼 뒤의 진실은 그리 달콤하진 않다. 미지의 세계이고, 또는 두려움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실을 살아가는가? 끝없이 보여 지는 인간관계의 굵은 알레고리들은 역사의 기록만 보더라도 그려진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전쟁의 역사, 자기의 죄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해나가는 인간들의 모습,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아파하는 모습 등등 인간의 굴레란 어찌 보면 좀 뻔하기도하다. 에우리디스의 스토리처럼 남녀가 만나 사랑이 파멸로 치닫는 역사도 인간의 굴레 안에 언제나 존재했던 흐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죽는다. 그건 불멸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보아야하는 것인가?
하나의 질문으로 남기고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로 시작하여 영화를 통해 인간의 어떤 점들을 하나 둘 보았다면, 그 다음으로 ‘당신은 어떤 것을 더 보았는가?’라는 단계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영화는 답을 주지 않았고, 우리에게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달아나버렸다. 정말 무책임도 하지만, 답을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으리라. 한마디로 삶이 정리되어진다면 우리는 ‘진리의 책’을 한권내서 그것대로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정의되어지지 않는 것이 답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던지는 사유는 눈 감는 날까지 관객과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던진 초대장을 들고 우리가 2015년 이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커튼은 항상 열려 있었고, 지금도 열려 있으며, 앞으로도 열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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