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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Capital 01> '형식을 파괴, 현실은 연계'
    문화예술 감상기/공연 및 연극 2017. 7. 25. 10:27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Capital 01>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Capital 01

     

    by 테아터라움

     

    원작- 베르톨트 브레히트

     

     

     

     

    - 형식을 파괴, 현실은 연계 -

    서론-

       이렇게 가끔 연극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블로그의 대문과 약간 결이 다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세계의 아우라나 전통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카메라를 통한 표현이 내 취향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혹은 솔직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영화라는 기술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은 다 능력의 범위 안에서 그 분야를 고수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화 이외의 예술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이질적인 게 아니다. 영화냐 연극이냐. 이 둘의 독특한 성격은 있겠지만 우리가 삶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둘 다 매한가지 아닌가? 내가 영화를 공부하고 다루는 이유도 결국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목적성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매체이던 작품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그렇게 이질적이진 않다.

       이번에 내가 본 연극은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Capital 01>이라는 연극이다. 원작은 독일의 작가 브레히트가 쓴 희곡이다. 이 작품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Epic Theatre)'과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가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해 현실 그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들을 서적을 통해 접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희곡만 보아도 그 효과는 나온다. 대사 중간에 등장하는 뜬금없는 노래 가사들(사실 노래인지도 잘 모른다. 혹자는 대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관객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대사들 등이 브레히트가 뭘 의도하려 했는지 파악이 된다. 그러나 희곡은 연극을 전제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연극이 살아서 숨 쉬지 않는다면 그의 텍스트들은 무언가 힘이 없어 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연극을 만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우연히 SNS를 통해 만나게 된 테아터라움이라는 극단이 브레히트의 연극을 계승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그들의 연극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접한 연극에서 나는 희곡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점들도 찾게 되었다. 그것은 형식과 직접적인 삶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대제목을 저렇게 짓게 되었다. 테아터라움의 연극은 다분히 형식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음에도 극의 마지막에는 묘한 전율과 슬픔이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감정이입을 피하려는 의도가 도리어 감정이입을 시키는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그 감정적 반응은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 우리가 흔히 영화나 연극을 통해 얻는 어떤 정화효과나 소모적 감정의 위로가 아닌,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 지 사유하게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또한 소품의 활용이 데페이즈망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곱씹어 보면 이 기법의 정통하지도 않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의 소품(카트)은 과거와 현재를 연계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상성을 깨고, 무의식으로 향해 돌진하는 본래 데페이즈망의 핵심과는 조금 벗어난다. 이 모든 부분을 본문에서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본론-

    파괴 그러나 연계

       테아터라움이 보여준 연극은 브레히트가 보여준 희곡의 흐름보다 더 파괴적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극의 음악적 효과나 혹은 관객에게 던지는 대사를 통해 관객을 극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준의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가 아니라 배우들이 직접 본인들의 실제 이름을 가지고 극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사연을 들려줌으로서 무대와 객석의 벽을 파괴하고 아울러 배우라는 아우라를 파괴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우리가 다를 게 없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배고프면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것, 배우자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인간이면 모두가 공감할 부분을 공유하면서 평범함예술(재능)’이라는 양 갈래에 놓인 개념을 무너트린다. 배우는 가깝지만 먼 존재로, 더 넓게는 예술가는 가깝지만 먼 존재로 여겨지는 현시대의 그 이미지를 부정하는 듯하다. 극의 정통적 형식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통적 이미지도 무너트리는 테아터라움의 연극은 브레히트의 텍스트보다도 파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구성의 근본에는 마법에 빠지지 않아야 함에 있을 것이다. 그 마법이란 감정이입을 통해 극에 빠져들게 하는 오묘한 감정일 것이다. 정통연극은 약속이 되어 있다. 관객과 배우들이 서있는 무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관객은 연극무대에 침투할 수 없고, 배우들도 관객들에게 사실감을 주기 위해 어떤 물리적 침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극에 몰입시키게 하여 벽이 있음에도 관객을 연극 무대와 동화되게 한다. 관객은 관음증적으로 극을 보고 있지만,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묘한 마법이 발생한다. 벽이 있지만 벽이 없다. 그런데 이 연극은 그냥 벽이 없다.’ 그렇게 해서 또 묘한 감정을 발생시킨다. ‘저기는 무대다 그리고 여기는 객석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관객은 어떤 마법에 빠지지 않는다. 결국, 마법에 빠지지 않은 관객은 이 극의 스토리가 아니라 이 연극의 구성과 흐름, 그리고 중간에 던져지는 어떤 자료를 보게 만든다. 이런 효과는 연극의 감동보다 현실적 물음을 던지고 그리고 그걸 생각해보라고 호소한다. 그래서 이 연극은 친절하진 않다. 하지만 관객들을 능동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만든다. 관객들을 단지 소비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사고하여 이 극을 능동적으로 비판 할 수 있게 한다. 마법에 빠지지 않으면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때문에 사고와 비판이 가능하다. 이것이 연출가가 선택한 형식의 의도일 것이다.

     

       테아터라움의 연극 혹은 브레히트의 연극은 정통에 대해 무의미한 파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파괴를 통해 좀 더 생각해 볼만한 가치를 관객에게 주고 싶음에 있다. 새로움에 대한 맹목성이 아니라, 어떤 표현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가 테아터라움 연극의 파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연극에는 재미있는 모순이 있다. ‘파괴를 통해 연계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연계이다. 극의 전통성을 파괴하고 심지어 어떤 이미지마저 무너트리는 것은 사실 연계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 설명하자면 먼 과거(1600년대)의 파편과 좀 가까운 과거(1900년대) 그리고 현재와 밀접하거나 아니면 현재(2000~현재)에 이르는 시기가 연결되어 있다. 형식으로만 보면 매우 파편적이라 드라마의 흐름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극은 장마다 대과거로 갔다가,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온다. 그리고 이건 어느 시점의 규칙성도 없다. 연극의 배경인 30년 전쟁의 시기는 고정적일 수 있으나, 그 시점에서 점점 현재로 오는 점프하는 시간은 불규칙적이다. 마치 영화의 점프컷(Jump Cut)같은 느낌이다.(<네 멋대로 해라>참조 film by Jean-Luc Godard) 그렇게 내러티브가 조각나서 파괴되어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는 만 그런 것이다. 연출가가 지정한 그 시기와 자료들은 전쟁과 돈이라는 테제가 있다. 30년 전쟁의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문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에서 벌어지는 중동과 미국 혹은 IS에 대한 문제. 정의를 외치며 피를 보게 하지만, 결국 그 죽어나는 것은 평범한 서민이다. 뒤에서 권력자들은 부를 축적한다. 연극에서 보여준 6.25전쟁과 일본수입현황 연관성(미국에 대한 내용도 있다.)에 대한 그래프는 전쟁과 돈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확실히 보여준다. 앞에서는 관념으로 무장한 용사(?!)들이 뜬구름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지만 그 링 뒤에서 누군가는 돈을 챙기는 게임을 한다. 그것이 전쟁이다. 무기는 소비되어야 군수물자에 대한 경제가 돈다. 어딘가 초토화가 되어야 발전을 시키는 투자가 일어난다. 누군가 값싼 노동력이 되어야 우리가 쓰는 아이폰의 가격이 저렴해 진다. 그렇기 위해선 뭐가 필요한가? 바로 식민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을 경제를 빼놓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전쟁은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국민의 우월성이라던 지 종교적 청결함이라던 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실현을 외친다던지. 그러나 그 뒤에선 자본가 혹은 권력자의 돈거래가 오고가고 있다.

       여기서 이 연극의 소외효과와 연결이 된다. 우리는 그런 명분의 마법에 빠지고 흥분한다. 그리고 언젠가 일본의 천황패하만세를 외치듯 무차별한 종북척결을 외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법에서 벗어나 냉철하게 상황을 보자면 누군가 우리의 다툼을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떤 권력자가 말이다. 이 연극의 소외효과는 이 지점과 연결성이 있다. , 우리는 흥분된 감정이입 그 마법에서 벗어나야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모든 문제의 토론이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1600년부터 2017년까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알레고리가 있다. 그것을 이 연극이 간파하고 있고, 겉으로 형식적 파괴가 있지만 내용적으로나 메시지 적으로는 오히려 시대의 연계가 돋보인다. 그리고 어느 시기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과 권력이 분리된 적이 없음을 시사한다. 과거는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유사한 형태의 상황을 반복할 뿐이다. 이 연극은 이런 개념을 관객들에게 깨우치기 위해 겉으로 형식의 파괴를 선택한 것이다. 내러티브의 흐름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가시적인 것은 깨질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띠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진실이 더 중요하다. 연극은 그런 목표 아래 파괴와 연계라는 모순성을 지니게 된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글귀가 생각난다. 결국,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지금도 그 후예들이 역사를 이어간다. 그것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우리의 모순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참조 written by Walter Benjamin)

     

     

     

     

    소품의 활용_데페이즈망과 표현방식에 대해

       데페이즈망을 구지 붙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안 붙일 이유도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에서 사용된 소품의 사용은 데페이즈망의 본래 의도를 위함은 아니다. 데페이즈망은 저명한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가 즐겨 사용한, 거의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기법인데, 그 효과는 현실을 벗어남에 있다. 초현실적인 곳으로 관객들을 보내고 그곳에서 프로이트적 접근이 가미된다. 시기적으로 봐도 반이성적 의미가 더 짙다. 데페이즈망기법은 어떤 식이냐면 일상적인 어떤 물체를 전혀 뜬금없는 곳에 두어 꿈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효과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계 초현실주의 감독인 루이스 브뉴엘의 첫 영화 <앙달루시앙의 개>에서 보면 죽은 말이 평범한 가정집 안에서 피아노에 끌려 나온다. 말이 이층집 집에서 나올 리가 없는데 나온다. 혹은 방을 가득 채우는 장미가 있다든지 하는 것이다. 장미는 방의 크기보다 클 수 없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작품 {레슬러의 무덤}은 그렇게 그려졌다. 이런 식으로 익숙하지만 익숙지 않은 배열을 통해 초현실적인 감상을 주고, 그것을 통해 인간 본성으로 침투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데페이즈망이다.(인터넷검색만으로도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고를 요하는 이 작품에서 데페이즈망을 붙이기는 조금 어색하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등장하는 카트는 분명 데페이즈망적 기질은 있다. 30년 전쟁배경에서 정말 현대적인 카트의 배치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자칫 그 소품의 사용이 의도하지 않게 초현실적 환상으로 불러일으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품의 사용은 과거와 현대를 연결하는 하나의 접속사적인 연결을 꾀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연극은 형식의 파괴가 있지만 시대를 관통하나 하나의 굵은 알레고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1600년대나 2017년인 지금이나 연결성을 가지는 즉,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이 소품의 배치를 이질감적으로 느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징성을 가지게 한다. 시장의 상징이기도 한 저 카트는 모양이 다를지라도 1600년대나 지금이나 그 쓰임새는 동일하다. 억척어멈이 당시에 끌고 다닌 수레나 현대에 끌고 다니는 수레나 장사를 하기위한 용도의 쓰임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겉모양이 다르더라도 그 용도는 시대를 관통해서 존재한다. 그렇게 저 시대에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과 현대는 다르지 않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극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1930년대 쓰인 브레히트의 이 희곡이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무대 위에 올라야 함은 현재 우리가 깨달아야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한 시대를 음미하는 감상적 작용이 아니라, 현재 우리는 무엇에 쌓여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깨우기 위함에 있다. 그렇기에 현대적 카트의 사용은 극의 외형적 이질감을 줄 순 있으나, 연극 전체의 의도와는 전혀 떨어지지 않는 오히려 더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겠다. 내가 구지 데페이즈망을 끌어들인 이유는 이것이다. 표현의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매체가 발전하면서 그 표현방식은 더욱더 다양해질 것이다. 이제 미술과 영화의 경계도 생각보다 미묘하다. 데페이즈망도 그 표현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그런 다양한 표현들의 주춧돌은 무엇인가? 사실주의던, 표현주의던, 초현실주의던 그 다양한 양식들 사이에서 우리가 놓지 않아야할 끈은 무엇인가?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작품을 감상할 때 형식적 리얼리즘에만 치중했지 내용적 리얼리즘이 빈약한 작품을 간간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 좀 실망을 느낀다. 반면 형식이 매우 표현주의적이고, 어쩔 땐 조잡스러울 때도 있는 작품을 본다. 그러나 그 내용이 현실을 거울처럼 보여주기 때문에 때론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 작품을 좋아한다. 이렇게 표현방식이 다가 아님을 느낀다. 창작자가 어떤 내용을 채워나갈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은 현실을 벗어나 개인의 무의식을 향해 돌진했다면, 이 연극에서 데페이즈망적 요소는 묘하게 현실을 인지하게 만든다. 내가 서있는 환경, 그 위치를 인지하게 만든다. 이 연극은 가짜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면서 초현실적 경계로 넘어가게 하지는 않는다. 초현실주의 작품도 가짜라는 걸 인지하고 환상으로 빠져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연극은 가짜를 인지하며 현실도 인지하게 한다. 이런 면이 독일예술이 가지고 있는 묘한 언어가 아닌가 싶다. 브레히트와 파스빈더의 독일예술은 사실주의과 표현주의의 경계에서 묘한 줄타기를 타고 있는 듯하다.

       추가적으로 한국에서 잘 안 알려진 독일 감독 한분을 소개하고 싶다. 위 단락에서 잠깐 언급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einer Werner Fassbinder) 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는 한국에 조금 알려진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도 위와 같은 느낌을 맛 볼 수 있다. 조명의 사용이나 미술이 표현주의적인 느낌이 강하다. 어쩔 때 색감과 메이크업이 현실과 동떨어지는 감도 있다. 그런데 작품이 전체적으로 묘하게 현실과 괴리감이 크지 않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처럼 잔존하는 나치즘에 대한 언급이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나오는 미국이 독일에 가하는 영향력, <릴리 마를렌>에서 보여 지는 경제 기적(혹은 라인강의 기적)’등 그의 표현방식과 다르게 내용은 굉장히 현실과 밀착되어 있다. , 사실주의냐 초현실주의냐의 이분법적 토론보다 표현방식으로 어떤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는 지를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독창성이 뛰어난 표현방식이라도 멋진 허울만 남긴다면, 혹은 그 예술가의 천재성만이 주목된다면, 예술은 그다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진 않을 거 같다. 그런데 만약 예술이 우리의 삶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건 현실을 비추는 거울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전쟁과 여성

       여기서 또 주목 할 점은 억척어멈인 안나 피어링의 배다른 아이들이다. 캐릭터 설정부터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의 정말 처참한 피해자는 누구인가? 극에서 여성으로 캐릭터를 설정한 이유는 전쟁의 약자 중 약자인 여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전쟁 속에서 여성은 힘이 없다. 힘겨루기를 하는 남자들의 욕망을 푸는 도구일 뿐이다. 극 중에서 억척어멈 안나 피어링이 성이 다른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던 상황을 상상해보자. 정말 끔찍하다. 그들의 방망이는 한 여성의 삶과 그 아이들을 처참하게 만들어버린다. 또 생각해 보자. 말 못하는 카트린의 순수성이 파괴된 그 상황을 말이다. 종교전쟁이라고 하면서 남성의 욕망은 눈 감는 것인가?

       전쟁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성(Sex)과 분리된 적이 없다. 한국도 그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 아닌가? 제국주의 일본에게 당한 피해,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통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강간. 그뿐인가? 1600년대부터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전쟁에서도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한다.

       전쟁은 절대 위대한 것이 아니다. 현대에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청하고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무력적 충돌은 이래나 저래나 남성적 본능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위대함이나 어떤 위상을 얻는 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는 위대함을 명분으로 싸움을 벌인다. 영문도 모른 채 소시민은 그렇게 죽어간다.

       남성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나도 남성이다.) 우리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남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 힘. 만약 그런 게 본능적으로 존재한다면 우린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무식한 발언은 안했으면 좋겠다. 원래 그래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자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동물처럼 살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더불어 살지 고민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분들은 본인의 방망이가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아쉬운 점

       이 연극의 전체적 구성은 탁월하나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안나 억척어멈(안나 피어링)의 이중적 모습이 생각보다 흐리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원작에서는 이 연극의 등장인물 보다 훨씬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모두 생략이 되었다. 물론, 생략된 캐릭터의 대사들 일부가 음향효과를 통해 나오기는 하나 캐릭터간의 관계성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그 관계성이 필요한 이유는 억척어멈이라는 캐릭터의 이중적 모습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억척어멈과 취사병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취사병은 억척어멈에게 여관으로 가서 장사하며 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그는 카트린을 빼놓고 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는 그 여관은 두 명밖에 살 공간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억척어멈을 설득한다. 그러나 억척어멈은 카트린을 놔두고 갈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장면이 억척어멈의 인간적 모습을 풍기게 한다. 또한 그녀가 전쟁을 무조건 적으로 숭배한 것도 아니다. 원작에서는 전쟁이 지속되던 평화가 지속되던 가난한 사람은 똑같이 가난하다는 식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평화가 왔다는 말에 억척어멈은 한편으로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사들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이 된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조언을 해준다. 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팔아버리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물건을 팔려고 달려가기까지 한다. 비록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고 돌아오지만 말이다. 이런 관계성은 억척어멈이 무조건적으로 전쟁을 바라고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억척어멈은 주변 사람들의 말에 잘 휘둘린다. 혹은 그 상황에 잘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고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7장에서 황금기를 맞지만 억척어멈이 부른 노래는 기쁨의 노래보다는 전쟁의 논리에 대해 구슬픈 노래를 한다. 이런 점을 보아 이 연극에서 억척어멈이 너무 야박한 캐릭터로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아쉽다.

       억척어멈의 이중성이 보아야 함은 억척어멈의 장사가 연극 중간에 등장한 자료들과 묘하게 겹쳐 억척어멈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의미가 관객에게 다르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억척어멈의 장사는 미국이나 일본이 전쟁을 통해 벌어들인 행동과 똑같다. 그렇게 되면서 약자가 살아가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나쁜 행동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오류가 발생된다. 억척어멈이라는 캐릭터는 원작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 있다. 그래서 원작의 내용이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준다.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한 인간은 힘없이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억척어멈의 인간적인 면이 배어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너무 야박하게 그려져 한 개인과 환경의 관계성이 가려지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브레히트의 희곡에서 인간을 근본악으로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천의 선인>에서도 그 선인은 처음에 순수했다. ,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캐릭터를 구성한 게 아니라 인간은 선하나 악해지는 것이라는 전개로 캐릭터를 구성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악은 어떤 사회구조가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부분이 브레히트 희곡의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테아터라움의 연극은 그 부분이 흐려지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억척어멈이 너무 야박해 어떻게 보면 인간의 근본악에 대해서만 표현하는 감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또 다른 아쉬움은 난무하는 개그인거 같다. 이 부분은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 크다. 임형진 연출가는 브레히트가 항상 이야기 했던 게 있다. 어려운 것을 웃기고 우스꽝스럽게 할 수 있는 요소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연극의 대상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는 그 두 지점을 다 하고 싶다.”(민중의 소리 인터뷰 기사 발췌) 라고 하였다. 이 인터뷰에 크게 공감하고 동의한다. 하지만 적정수준 이상은 극을 오히려 민망하게 만드는 감이 있다. 극에서 벗어나 배우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장에서 게임에서 나올 거 같은 혹은 애니메이션에서 나올 거 같은 음향의 활용은 너무 장난스러움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억지로 웃기려고 한다는 느낌이 강해 배우들의 눈을 못 마주칠 정도였다. 그런 것 보다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하는 부분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유머코드가 아니었나 싶다. 기계음을 활용한 개그는 너무 억지스러움이 크다.

       너무 웃기려고 덤비는 것은 오히려 관객에게 민망함을 준다. 그것이 연출의도라면 성공한 것이지만, 소소한 웃음을 줘 딱딱함을 깨고 싶었다면 현재 수준의 유머코드는 너무 오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브레히트가 말한 어려운 것을 웃기고 우스꽝스럽게 하는 것은 배우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하는 부분이나, 극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극을 벗어나 기계적 음향 효과로 웃음을 유발하려는 시도는 웃음을 강요하는 것과 같았다. 그 부분의 밸런스가 맞으면 좋겠다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마무리-

       테아터라움의 연극은 정통적인 형식의 벽을 허물고 우리의 삶으로 직접 다가온다. 그래서 그런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형식적 구조가 아님에도 극의 끝에서 묘한 꿈틀거림이 있다. 나의 위치와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사고가 깨어났기 때문일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와 무대 위를 쉽게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 무대 위에 마치 어떤 영혼들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권력아래 죽을 수밖에 없던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 연극이 끝나고 밖을 나오니 세상 곳곳에 영혼들이 떠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지하철을 타고 구의역을 지나갈 때, 거기서 들리는 평범한 청년의 울음소리. 목포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바다 위에서 들리는... 그 수많은 아이들의 울음소리. 컴퓨터 부품을 사러 용산역에 내려 길을 걸어가는데 어느 건물 옥상에서 들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울음소리. 연극이 끝난 후 그 아픔들이 나를 마구 찔렀다.

       수많은 아픔들 앞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통의 재현일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까? 재현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이 연극은 예술로서 할 수 있는 최대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연극이 진리이며 100%완벽하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대화가 무엇인지는 물음을 던지고 있음은 틀림없다. 이 연극 한편이 모든 걸 바꾸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 지도 우린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토론에 앞서 우리는 이 연극이 보여준 어떤 진실을 파악하고 있어야 함은 맞는 거 같다. 우리를 둘러싼 진짜를 파악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대화가 될 수 있다. 이 같은 연극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랑비에 옷 젖 듯, 세상이 조금씩 더 아름다워 지기를 기대해 본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두루미, 슈비니 핸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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