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Vivian Maier 그녀에 대하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
그녀(우리)에게 필요한 한마디-
심플한 다큐멘터리이다.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발자취를 찾아가는 것으로서 다큐멘터리로서 특별한 점을 찾기란 어렵지만, 소재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다. 다큐멘터리가 재미있는 짜임새를 가진다는 것 보다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나 흥미롭다.
평생 유모로 산 평범한 여인이 찍은 사진들이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발견되었다. 약 15만장 이상의 필름과 사진들. (뿐만 아니라 영상과 녹음테이프까지 발견되었다.) 이 영화의 감독이 그것을 세상에 공개하였고,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은 사진작가로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비록, 그녀가 하늘나라로 간 뒤였지만 말이다.
그녀의 밑에서 자란 아이들과 그녀와 함께 세월을 지낸 지인들을 수소문하여 인터뷰를 한다. 그녀에 대한 여러 측면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밝은 면만이 아닌 그녀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표현되어 진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는 것을 느낀다. 그녀에 대한 이해가 그런 어두운 면을 통해서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굉장히 광적으로 집착하였다. 그런 부분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비안 마이어의 매력 한 부분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광적인 면이 지금의 필름들을 보관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도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할 말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많은 사진들을 남길 이유가 전혀 없다. 단순한 취미 그 이상으로 그녀의 사진에는 무언가가 묻어 나온다. 사진에 담겨진 오묘한 연민과 메시지들은 그녀가 이 사진 작업을 단지, 취미로 가볍게 했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녀는 무언가 마음속에서 엄청난 갈등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작품의 공개로 인해 자신을 찾아올 비판에 그녀는 상처를 입기 싫을 수도 있다.
작품을 작업하는 사람이라면 비비안 마이어가 왜 작품을 저리도 숨겼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거라 본다. 나의 작품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마치 흠....... 파도 위에 홀로 서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니면 사막 한 복판에서 홀로 서있는 느낌일 수도 있다. 나의 작품이 보여 지는 순간 판단이 시작되어지고, 비평안에서 난도 질 당할 수도 있다. 처음 나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맞나?’라는 작품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더 나를 작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작품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강력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만약 작품을 작업하고, 그것이 누군가와 소통되어지길 바란다면, 비판 또한 수렴할 강력한 마음이 있어야한다. 정말 어려운 것이다. 계속 부딪혀가며 작품을 꾸려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 위에서 나의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도 처음에 시나리오를 썼을 때가 기억이 난다. 그때도 아주 불안했다.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마음이 앞서고, 결국 자꾸 내가 쓴 걸 숨기게 된다. 세월이 어느 순간 개의치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아마 이런 불안 속에서 계속해서 갈등을 겪고 있던 게 아닐까? 그녀가 이걸 공개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면 그녀도 공개를 하고자 했던 희망이 묻어나는 편지가 발견된다. 그런 점을 본다면 아마 저런 갈등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 듯하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생각보다 강하진 않았다. 어떤 여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과거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한다. 특히 남자에 대하여 굉장히 비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힌다. 어떤 남자가 살짝이라도 자신의 몸에 터치하려고 하면 놀라며 화를 엄청 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추측하건데 그녀는 분명 인생에 있어 어떤 큰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커버되지 못하였고, 그녀는 오히려 더 신경질 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트라우마로 인해 마음은 딴딴하지 못했다. 그런 불안한 마음가짐은 확실히 무언가를 당차게 할 행동으로 이어주지 못한다.
삶에 있어 큰 불안을 느끼고 있던 그녀에게 어떤 행동의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품에 대한 의구심과 싸웠을 수도 있다. 내가 비비안 마이어를 실제로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런 그녀의 불안함은(무엇이라고 딱 정의내리긴 힘들지만) 충분히 느껴졌던 거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나는 이런 말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군가 그녀의 사진을 봐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있었다면 아마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녀에게 에너지를 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을까?
예술 작품을 하고자하는 그 누군가는 따뜻한 한마디와 부드러운 조언이 필요하다. 표현은 신이 주신 가장 고결한 능력이고, 그것을 다듬을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덕목이다. 그러니 우린 그들에게 따뜻한 한마디와 부드러운 조언이 필요하다. 언젠가 작품을 하는 그들이 당신을 위로할지 모른다.
예술은 누구에게나 -
비비안 마이어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진가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사진을 좋아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그녀가 관객의 입맛을 맞춘 사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사진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그녀의 사진을 보고는 감격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미국 사진협회에서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의 기준이 흔들리는 포인트이다. 흠......... 이야기하기 좀 민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분명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예술이란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최고의 예술이란 정말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화려한 색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보지 못한 프레임의 충격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다양한 해석이 섞여있는 예술이라는 이 분야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데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을 놓고 생각해본다면 예술이란 정말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느낀 점은 내가 전공을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천박해 보였다. 내 주변에 분명 누군가는 대학교가 딱지로 붙여주는 전공이라는 개념을 개나 줘버리고 자신의 삶을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을 별 생각 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다시 곱씹어보면 그들이 비비안 마이어일 수 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서 ‘전 영화전공이에요!’ 하고 떠들어댄 내 모습이 너무나도 웃겨보였다. 예술 활동이란 어떤 전공의 틀 안에서 행해져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아니었다. 비비안 마이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유모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유모가 저런 사진을 찍었다. 그렇다면 2015년인 지금 청소부가 저런 사진을 찍지 못하란 법은 없다! 노점상이 저런 작품을 남기지 못할 것이란 편견은 없어져야 한다! 편견은 그녀의 작품들을 통해 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예술을 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예술에 대한 모호한 경계. 사실 예술은 경계가 생기면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 세계는 그렇게 평등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계가 생기는 순간 평등도 깨진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이 대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포인트는 저 평등 안에서 그녀의 사진이 그 누군가에게나 보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어져 있다. 비비안 마이어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예술에 대한 깊은 교육에 의해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은 세상에 존재하며, 배워야 할 우리의 장소는 세상이다. 나는 영화를 전공하였고, 그것에 대하여 비록 너무나 부족하지만, 공부를 해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감이 안 온다. 어떤 시나리오가 정말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정말 새로운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알면 알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진다. 그리고 결국 난 시나리오를 한자도 못 쓰는 바보가 되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비비안 마이어처럼 좋으면 해야 했다. 그냥 느낌가는 대로 하는 것도 어쩔 때 보면 굉장히 현명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미술, 음악, 또는 영화를 하고자 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해.’라는 생각을 당장 개나 줘버리길 바란다. 그렇다고 내가 본업을 접고 예술의 길로 가라는 말은 아니다. 간단한 작품 활동은 취미로도 가능하다. 그렇게라도 그 본능을 죽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통해 당신은 더 큰 빛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과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난 그것이 예술이 주는 인생의 크나큰 힘이라고 본다.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것은 단지 대단한 사진 몇 장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그녀는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녀의 삶과 그녀의 사진을 통해 예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 비비안 마이어이다. 그러니 예술에 대한 본능을 부디 죽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Written by 두루미
사진출처- 다음영화
p.s. 대한민국에서 비비안 마이어전시가 한다고 한다. 꼭 보러가야겠다.